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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서정주]기도

by 발비(發飛) 2005. 12. 5.

기도

 

서정주

 

저는 시방 꼭 텅빈 항아리같기도 하고 또 텅빈 들녘같기도 하옵니다

하늘이여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날으는 몇 마리의 나비를 두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가니와 같이 하시든지

마음대로 하소서

시방 제 손은 꼭

많은 꽃과 향기들이 잠겼다가 비어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텅 빈 항아리같은 몸입니다.

그리고 텅 빈 들녘같은 몸입니다

 

어쩌면 비워지지도 않는 몸을 비우려고 비우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빈 몸을 채우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

 

너무 찬 날에 거리를 걸으며

나에게서 텅 빈 항아리처럼 걸을때마다 퉁퉁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머리속이 퉁퉁거리며 울리고

뱃속에 퉁퉁거리며 울리고

텅 빈 항아리처럼, 텅 빈 들녘처럼 몸이 소리를 냅니다.

 

어제는 잠을 잤습니다.

24시간 중 딱 2시간 깨어있다가 나머지는 잠을 잤습니다.

잠과는 친하지 않는 내가 어제는 종일 잠만 잤습니다.

하루를 자고 오늘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그 사이, 꿈속에서 살아서인지 내가 자고 있던 방이 낯설고, 벽에 걸린 옷들이 낯섭니다.

온갖 잡동사니로 뒤범벅이던 머릿속이 텅비었습니다.

잠자는 동안 마치 윈도우 XP처럼 스스로 데이터를 정리했었나봅니다.

퉁퉁거리며 출근을 한 아침, 바람이 찼습니다.

 

그래, 지금 텅빈 그대로 얼어버려라. 그랬습니다.

퉁퉁거리며 다니게, 그렇게 걸어다니게,

 

시인은 기도를 합니다

'마음대로 하소서'

저도 기도를 합니다.

"마음대로 하소서"

그저,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하소서. 어떻든 신의 안에 있게 하소서,

버리지 마소서.

벌이든, 상이든, 어떤 것이든 마음대로 하소서... 버리지 마소서,

그렇게 오늘 아침 퉁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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