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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가을 저녁 경복궁

by 발비(發飛) 2005. 11. 7.

 

 

저녁 6시쯤이다.

경복궁 옆을 지나갈 일이 있었다.

날은 어둑 어둑해진다.

건춘문을 지나서 경복궁으로 들어섰다.

 

가을 저녁 경복궁은 텅 비었다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내게로 온다.

내 눈을 보면서 오는 것을 보면,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나보다.

 

"인터뷰 좀 부탁드릴께요."

"....."

"저희들은 고려대학을 다니는 학생인데요, 경복궁에 관해서 인터뷰하려구요."

"네 그러세요."

맹숭하게 걷다가, 그냥 응한다.

"관광오셨어요?"

"아니요, 지나다가 들렀어요."

"경복궁에 대한 첫인상은 어떠세요?"

"삭막했었어요."

"경복궁에서 맘에 드는 점이 있다면요?"

"맘에 드는 점이 아니라, 전 아미산을 좋아해요. 교태전에 있는 아미산, 그리고 굴뚝도요."

"왜요?"

"거기 있으면 맘이 편해져서요."

대답이 부실한 모양이다.

"청와대 가보셨어요?"

"아니요."

"청와대와 경복궁 중 어느 곳이 나라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음~ 경복궁요."

"왜죠?"

"기준점으로서 경복궁이 더 강한 느낌이 들어서요."

 

이렇게 대답했었는데, 하루사이에 생각이 바꼈다.

맘속에 이미 기준이 경복궁이더라도 이젠 청와대로 기를 몰아줘야 하는거 아닌가 싶어서....

모르겠다.

아무튼 나의 대답을 후회했다.

하지만,

언제 누가 물어도 솔직하다. 꼭 열심히 대답한다.

딱 한 마디만 빼고

......

 

 

"감사합니다."

"네 수고하세요."

 

인터뷰를 하려거든 밝은 날 사람 많은데서 하지, 아무도 없는데도 뭘할까나..

 

 

 

-흥례문-

 

1997년에 흥례문과 주변행각, 유화문, 영제교 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98년 9월 23일 상량하여 2000년에 준공하였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중심축선상에 위치하며 2층 건물로 상하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중앙어칸이 좌우 변칸보다 2척이 더 넓은 18척으로 근정문과 비슷하다. 중층 다포계 겹처마 우진각지붕으로 마루는 양성을 하고 용마루 양단에는 취두를 상하층의 추녀마루에는 용두와 용두아래로 7개씩의 잡상을 배치하고 사래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동측면의 내부쪽으로는 이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설치되었다.

 

 

 

 

 

-광화문-

 

1395년 태조 4년에 처음 지어진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던 문이었다. 하지만 1926년에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의 하나로 조선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화재로 문루 부분이 소실되어 석축만 남게 되었다.

 

 

 

 

 

관람시간이 지나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광화문과 흥례문.

 

좀 더 어두워졌다.

광화문의 세 구멍(?) 사이로 빛들이 움직인다.

빛을 찾아서 따라가보았다.

멀리 세 구멍에서 스쳐보이는 빛

좀 더 가까이 한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

 

아예 그 구멍으로 들어서니 그저 구멍은 사라지고 넓은 도로에 쌩쌩 달리는 차들, 그 빛

 

 다른 세상

한 발 디디때마다 다른 세상.

많이 다른 세상

 

 

뒤를 돌았다.

내가 나온 구멍으로 흥례문이 보인다.

어둡다.

구멍을 사이에 두고, 빛과 어둠이 나란하다.

한 나라의 궁궐이 수도의 한 가운데 어둠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빛들,

빌딩의 불빛, 차들의 불빛, 네온광고의 불빛, 신호등의 삼색불빛.....

그 많은 불빛들 가운데

 

어둠이 동드라니 있었다.

혹! 핵일까?

 

           

 

조명발 받으며, 해태가 양쪽에 앉아있다.

가까이 가서 올려다보았다.

목걸이도 달고, 발은 두터우니 다부지다.

입은 앙다물고 거기 멀리 사람들을 보고 있다.

"잘 하려나"

그렇게 혼잣말 하는 것 같았다.

 

 

-해태-

 

중국의 고서인 이물지(異物誌)에 의하면"해태"의 모습은 양과 비슷하게 생겼고 뿔이 한 개 돋아 있으며, 그 성질은 충직(忠直) 하고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능히 구별할 줄 알아 사람들이 다투고 있을 때에는 옳지 못한 자를 가려내어 그를 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고대 중국에서는 법관의 의복에 해태의 모습을 장식했다고 하며, 법관이 쓰는 관을 "해치관"이라 불렀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조선시대에도 재상이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은 광화문 해태 상의 꼬리에 손을 얹어 마음을 바로잡는 풍속이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잦은 화재로 공사가 지연되자 남쪽의 관악산이 휴화산인 이유로 그 불기가 빌미가 된다는 지관의 주장에 따라 광화문의 좌우에 해태상을 설치하여 화재를 막고 길운을 빌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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