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히는대로 詩

한 여자를 위한 두 편의 시

by 발비(發飛) 2005. 10. 25.

한 여자가 세상을 달리 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세상을 달리 한다는 말. 그런 표현이 있지.

그래. 한 여자가 세상을 달리 했다.

그 여자는 함께 했던 세상의 모든 연들을 끊어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간 것이다.

 

불교의 말대로 하자면,

다시 윤회의 궤를 돌아 다른 모습,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다른 모습, 이건 상상을 초월한다, 풀일수도 개미일 수도 닭일 수도, 내 조카가 될 수도,

니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이 되어 이세상과는 무관하게 되던지.

 

카톨릭의 말대로 하자면,

천당, 지옥, 연옥 이 세 곳 중 어느 세상에 적을 두겠지. 이제 더이상 이 세상 사람들과는

무관해지는, 모두가 똑같은 곳에 살겠지.

그 곳이 천당이든, 지옥이든, 연옥이든, 그 곳에는 자식도 부모도 사촌도 알아볼 필요도 알아보지 못하고 다 똑같은 곳이라니까.. 그런 것은 이세상에서만 존재하는 거라니까.

 

기독교의 말대로 하자면,

천당과 지옥, 둘 중 한 곳 이겠지.

가장 분명한 곳이지. 50%의 확률이니까. 상상하기가 수월한긴 하다.

 

한 여자가 세상을 달리해 지금 어느 곳에 있는 지 알 수 없다.

정말 알 수 없다.

 

남은 사람- 이 표현이 난 맘에 든다.

남겨진 사람, 한 여자가 떠난 것이 아니라, 한 여자를 중심으로 모여있던 사람들이 모두 남았다.

이세상에 남아있다.

왜냐면, 한 여자를 그리워하니까... 남은 사람들이.

 

남겨진 사람의 시다.

 

 

모래의 집, 불의 집

 

박체천

 

여섯 살짜리 손녀 정주가 모래집을 짓는다

-여기는 할머니 집이야

까슬한 마음의 모래알들이 모여 하나의 집을 이루었다

-모래집 속에 할머니가 계셔

 

모래의 집을 들여다보며

문득 불의 집을 떠올렸다

엊그제, 화장장의 분호구에서 아내는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불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내 가슴에도 불의 집이 생겨났다

그, 불의 집은 휴화산처럼 불을 숨기고 있다

혼자 캄캄하게 마음의 집을 지키고 있노라면

불의 집이 나타나고, 불길이 다시 솟아오른다

보이지는 않지만, 저 불 속에 아내가 있을 것이다

 

땀을 흘리며 만든 모래집을

정주는 다시 뭉개고, 새 모래집을 짓는다

나도 불의 집을 보기만 하곤, 다시 지워버린다

 

정주와 나는

이렇게 매일 새집을 짓는다

-할머니에게 늘 새집을 지어줄 거야.

 

어떤 이들에게 아내였고, 할머니인 한 여자.

한 여자는 남편을 남겨두었고, 손녀를 남겨두었다.

 

이 시를 읽는다.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워서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볼 수 없는 누군가가 그리워서 찔끔찔끔 눈물이 짜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 시를 소리내어 읽는다.

 

목이 메어옴을 느낀다.

내 목에 강하디 강한 힘줄이 탱탱하니 메어있음을 느낀다.

뻣뻣해지는 힘줄을 타고 오르는 긴 숨이 느껴진다.

그 숨이 단단한 힘줄을 통과할 때즈음이면, 난 울컥하고 눈물을 맘껏 쏟아 부을 수 있다.

 

내가 찔끔거리던 눈물이 시인의 슬픔에 묻어 펑펑 울 수 있다.

내 그리운 이가 세상을 달리한 시인의 한여자인듯 그렇게 펑펑 울 수 있다.

 

시는 그런 것 같다.

 

가을 언덕에서

-동창 김정희를 보내고

 

신용선

 

더는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

 

악수를 나누고도 돌아보며 한 번 더 웃어주던

초여름 햇살 같던 그 웃음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충청도 어디 저잣거리에서 건어물 흥정을 하고 있는

그대를

보았노라고

 

히말라야 계곡의 눈 덮인 마을 어귀

토산품 가게에서

수를 놓고 있더라고

 

제수이트 수도회가 만든 순례자를 위한 집

뜨락 돌계단에

앉아 있더라고

 

누가 좀 우겨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중에 덜 늙어 저 혼자

곱더니

 

견딜 일 다 견디고 알맞게 무디어져 이제야 일없이

우리 몫의 삶을 시작할 나이에

홀연 떠나간 내 친구 김정희

 

그대가 버린 이후 볼품이 없어진 세상, 시들어

까만 꽃대궁으로 남은 늦가을 언덕에

맑은 술 한 잔을 붓나니

 

거기가 어디이든 그대 편안하길 빌며

 

한 여자에게 남겨진 또 한 사람.

친구라네.

오랜 친구라네.

믿을 수 없다네,

가족이 아니라 한 여자의 부재가 믿기었다가, 아니었다가 친구의 죽음은 그런건가보다.

 

항상 내 옆에 있었던 것은 아니니

어느 곳에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의 그리움은 그렇게 우기며 서서히 말라가는 것.

 

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그런 것 있겠지.

하지만, 친구가 친구의 죽음을 보고 오열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친구는 그저 친구가 세상 다른 곳으로 갔을 때, 그 땐

남겨진 친구의 가족을 위해 제 울음을 참는 것,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면

"내 친구 어딨지?" 하고 찾는 것. 그런 것이 친구인 것 같다.

 

어릴 적에는 몰랐지.

친구는 아프지 않는 줄 알았지.

친구는 그냥 잊는 건 줄 알았지.

 

"그때 슬펐었어?" 하고 물은 적이 있다.

세상을 달리한 친구의 죽음을 본 친구에게 난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왜냐면, 남은 친구가 울지 않아서... 난 그 친구가 울지 않아서 ...

하지만 ,

남겨진 친구는 십몇년이 지난 어느날 세상을 달리한 친구가 보고 싶어 어느 강가로 갔다왔단다.

그때 내가 그렇게 물었었지.

 

"그때 슬펐었어?"

 

아직도 남겨진 친구는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진성] 테오에게  (0) 2005.10.26
[김선우]얼레지  (0) 2005.10.26
[정희성] 첫고백  (0) 2005.10.25
[조명무] 꽃과 나비  (0) 2005.10.25
[조양래] 성찬  (0) 2005.10.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