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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조양래] 성찬

by 발비(發飛) 2005. 10. 23.

성찬

 

조양래

 

  깊은 밤 머리 어깨 눈을 털고 떨며 다가서니, 무지

개미술학원 도레미피아노학원 북경반점 뚱뚱이족발 아

가방 청과 치킨 야식 그림의 떡 그 눈길에 닳고 닮은

스티커 어지러운 현관문 201호, 들어서면 바닥난 간장

병 낡은 싱크대 마른 프라이팬 털털대는 냉장고 주린

배에, 거기 밥상에 김치에, 세상에 달콤한 찬 밥 한 그

릇......

 

가을이다.

이제 곧 겨울이 될 것이다.

 

곧 겨울이 되면, 모질게도 추운 밤 낡은 연립 쇠현관문에는 온통 스티커들이 붙을 것이다.

겨울이 되면, 철현관문에는 따슨 집안에서 맛난 것 먹으라고 친철한 스티커들이 붙을 것이다.

추운 겨울밤,

현관을 들어서면서 매일 눈으로만 먹어, 결국 눈길에도 닮아 바래어가는 스티커를 뒤로 하고

냉골 방으로 들어서면,

......

맛나게 먹어야 하는 찬 밥에 김치에

그런 성찬 먹는 추운 겨울 저녁밥.

 

먹어야 산다.

그리 먹고도 살아야 한다면, 모두들 그렇게 말한다면 그리 먹고 살아야 한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

 

어제는 우리가 살던 옛집에 가 보았다

지하방 굴뚝엔 예처럼 김이 오르고

문을 열면 집나간 개가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분명, 분명 그건 얼마 전에 있었던 일 이었다.

 

과거는

과거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기억이라는 장치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기억회로를 작동시키며 과거를 생각한다.

기억이라는 장치가 작동할 때는 언제일까?

지금 내가 뭘 하는 지 잘 모를때 그때 기억이라는 장치가 작동하여,

넌 이런 사람이다. 하고 인식시켜주는 거지.

 

지금이 행복할 땐 사실 기억이라는 회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틈이 없어 기억할 틈이 없어서 회로는 잠정 휴업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을때

현재 내가 있으면서 현재의 내가 인식되지 않을 때 현재의 나의 모습을 추적하기 위해

기억장치를 작동시킨다.

현재가 난해하면 할 수록 기억장치는 아주 먼 과거로 가야 한다.

1년전도 아니야

5년전도 아니야

그럼 더 오랜전으로 가봐. 현재 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거야.... 그렇게 기억장치를 작동시킨다.

 

시인은 얼마 전에 있었던 일로 기억장치를 작동시켰다.

얼마 전?

얼마 전 이란 얼마 전 이라는 말일까?

5년?

10년?

20년?

아님 한 달?

 

시인은 얼마전 이라고 했다.

그의 얼마전은  현재의 그가 가고 싶은 곳이다.

아주 오랜 오랜 시간이 흘러간 그런 얼마 전이 아닐 거라고 우기고 싶다.

돌아갈 수 있는 그래도 무방한 그런 얼마 전이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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