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見聞錄

내변산

by 발비(發飛) 2005. 9. 26.

 

-산행 앞-

 

착각속에 사는 여자가 여기있다.

 

'지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울릉도를 다녀오고,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지난 주는 특히 퇴근후에도 부지런히 뭔가를 하며 종종 쫓아다녔었다.

금요일에는 회식이 있어서 한잔도 하고...

그럼 토요일에는 쉬어야 할 것 아냐?

 

그런데, 나의 과잉의욕은 장장 6시간 가까운 시간의 청계천, 종로, 인사동투어로 이어졌다.

그럼 일찍 자야할 거 아냐?

 

근에 '그것이 알고 싶다'는 왜 보냐고... 미국의 싸가지없음이 하루이틀일이냐고...

그럼 그냥 잘 것이지,, 왜 씩씩그리냐고?

 

"지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이팔청춘인 줄 알고 이리저리 설치고, 또 팅팅해져서 신사동으로 나왔다.

'난 중국산 에너자이거! 오늘은 쓸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외치면서...

근데 내 중국산 에너자이거는 버스에서 벌써 다 방전이다.

거의 처음으로 산행가는 길에 잤다.

맙소사! 난 시도때도 없이 자는 그런여자가 아닌데...

내가 아닌개벼?

조짐이 이상터라....

 

여기서 잠시 딴소리!

전날 작년에 변산반도를 왔던 햇빛맨에게 전화를 했다.

"나 내일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누나, 산으로 가요.. 바다 뭘 볼 것 없어서 심심하더라구요."

"알써~"

난 너무나 말을 잘 듣는 착한 여자다.

 

무조건 산행이다.

국립공원인데 한 번 올라가줘야지. 산악인자존심이 있지... 그럼서...

 

초반부터 경사가 장난아니다.

왜 그리 업이 되어있었을까? 그 이유는 모른다.

아마 내 에너지가 바닥이 났음을 내 몸이 미리 알아차리고. 앤돌핀을 마구 흘려주었던 듯 싶다.

좁은 산행길을 선두조에 엮이려고 얌체처럼 요리조리 추월하며 산을 오른다.

간혹 보이는 야생화도 찍으면서... 좋았다.

 

1.빨강

 

월명암에서 만난 상사화. 그 농염함에 매혹되어 셧터를 누르고 뒤를 도는 순간,

피부 하얀 보살님이 상사화와 같이 빨간 수박을 주신다.

두쪽이나 먹었다.

달콤함... 눈으로는 빨간 상사화에 뿅가고, 입으로는 달콤한 수박에 뿅가고....

월명암은 내게 아마 빨갛게 기억될 것 같다.

 

2.도대체 길만 보일 뿐 앞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게 많던 산악회원들도 보이질 않는다. 산악회 동생과 나 ... 둘이서 걸었다.

멀리서 무슨 댐이라구요? (봤는데... 에궁) 아무튼 무슨 댐..

원래는 계곡이었다는데, 밑에서 댐으로 막았다는 그 댐!

신기했다.

조그맣게 반짝이던 호수가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한참 걷고나면, 확대되어 나타나고...

또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한참 걷고나면, 또 확대되어 불쑥 나타나고..

거참! 산을 뺑뺑 돌고 있나보네..

그리 걷다 걷다 댐과 내가 평행선상에 있게 되었을때.. 참 좋더라.

초록물에 비친 산그림자. 나무그림자, 구름그림자... 세상것들에게 초록코팅 입혀 반짝이고 있더라.

물가에서 엉덩이 붙이고 얼굴을 바닥에 바싹 붙이고 물높이에서 물을 보았다.

물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쁘다.

 

3. 간다~ 간다~

 

 그 동생닉이 단지다. 단지와 나는 사람없는 내변산을 가고 있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배고파."

그 곳이 선녀탕 바로 옆이라는 걸 알았으면, 선녀탕에서 밥을 먹었을 것이다.

암것도 모른 두여자는 멸치와 계란말이를 나눠먹었다.

아무 생각없이 사진 찍으며, 낄낄거리며....

그늘이져서 온통 갈색인 우리의 식당! 그곳에 빛이 오고 있었으니, 산악회원들이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니구나... 어찌 반갑던지... 반가워서 마구 웃었다.

(그 분의 후기에 그 만남을 흐음님이 해맑게 웃었다고 했다... ㅋㅋ 진짜로 반가웠는데..)

이제 가자.. 틀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여~


 

4. 또 간다.

 

오르락 내리락...

터덜터덜... 뒤가 이상하다. 뭔가 당기는 기운이 느껴진다.

휙,,,돌았다. 단지가 이상하다. 다리를 절고 있다. 그 여린 것이 다리를 절고 있다니...

"왜?"

"언니, 발목이 너무 아파! 못 걷겠어."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복숭아뼈가 너무 아픈거.

난 지금도 그 악몽때문에 슬리퍼를 항상 갖고 다닌다.

단지에게 슬리퍼를 꺼내주었다. 단지는 그때부터 슬리퍼로 산행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단지의 발만본다. 대단한 고수라면서...

일명 조리를 신고 국립공원 산행을 한 단지.. 그녀는 더이상 연약녀가 아니다. 단지 화이팅!

우린 그렇게 또 간다.

그 와중에 길을 잃어 갔다가 되돌아오고... 에구... 정말 징한 산행이다.

 

-여기서 또 딴 소리-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

"단지야! 언니를 용서해라"

 

사연인즉 이렇다.

"언니! 우리그냥 관광조하면서 하루 쉬어요."

"야! 안돼! 땀 좀 빼줘야 해! 우이씨~ 따라와. 얼렁"

단지는 나의 억압에 못 이겨 산행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줄 아무도 몰랐다.

 

5.그래도 끝은 있더라.


슬리퍼 신은 여자와 그녀의 보디가드를 자처한 여자, 둘이서 산을 내려갔다.

내소사입구 화장실에 오니 산악회 사람들이 보인다.

그렇게 어디에도 없더니...

그런데, 내소사 길이 장난아니게 이쁘다.

"언니! 여기서 이야기하고 음악 들었으면 좋았잖아."

깨갱이다. 에고 미안해라.

 

내소사. 그 절도 이쁘더라,

부석사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오래됨이 그대로 오래됨으로 보여지는 그런 절이었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보지 못했다. 아마 내내 한동안 아쉬울 것 같다.


 

-산행 후에-

 

두 다리를 질질 끌며, 괴로워하며, 산이 뭐가 이러냐는 둥.

변산반도는 패키지 상품이었어.

하나씩은 쓸데없어. 그러니까 묶어서 국립공원이지.. 한꺼번에 다 보는 것이 아니면 진짜 별로야.

딱 패키지야.. 패키지 상품 중 하나만 겨우 얻었으니, 이렇지... 하면서 궁시렁 궁시렁...

 

정말 너무 힘든 몸으로 집으로 와서 사진 파일을 열어보았다.

사진을 보면서 놀랬다.

산에서 보이는 하늘과 바다,

산위로 드리워진 구름 그림자, 그 사이로 꽂힌 햇빛,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지금도 피어있는 들꽃들....

내가 지난 온 곳이 그런 곳이었다. 셧터를 누르면서도 난 그냥 습관적이었었나보다...

어젯밤 사진을 한참 보았다.  그 곳이 이뻐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좀 진지하게..

세상을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달린 것이었다.

내 눈은 내 마음과 내 몸이 시키는대로 렌즈를 바꿔낀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내 눈에는 흐린렌즈가 끼워진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세상이 뭐 이래? 그러면서...

내 몸과 마음이 좀 가벼우면, 내 눈에는 맑은 렌즈를 낀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본다.. 와~ 멋진 세상이다 . 그러면서...

 

내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이리뛰고 저리뛰어 다니면서 내 몸과 마음을 피곤하게 만들어놓고

세상이 왜 이리 흐린겨? 꿀꿀한겨? 하고 티티거리고 있었다.

오늘 종일 피곤해하면서...  난 어제 찍은 사진을 보았다. 산과 바다와 구름과 꽃들을 보았다.

 

내가 건강하고 내가 씩씩하고 밝아야만 세상이 그렇게 보일 것이다.

"지가 무슨 이팔청춘이라고" 까불지 말고  살자 싶다...

 

이번 주에도 제 스따일대로 주절거림의 극치인 후기를 마칩니다.

긴 주절거림 들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그대들에게 행운이 함께 하시길 비나이다. 영원

 







 





 





'見聞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꿈꾸는 곳에 그가 있다  (0) 2005.09.28
과자 권하는 사회  (0) 2005.09.28
내변산 야생화  (0) 2005.09.26
청계천 트래킹  (0) 2005.09.25
선운사에서 만난 꽃들  (0) 2005.09.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