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김기택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이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 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싹 마른자리를 견디고 있다
오래전에 달팽이를 키운 적이 있다.
유리컵 속에 흙을 얇게 깔고, 그 위에 랩을 덮었다.
그리고 숨통을 구멍을 뚫어주었다.
양식은 상추와 오이.
달팽이의 식성이 놀랍더라. 무지 잘 먹는다. 그리고 까다롭다.
좀만 싱싱하지 않아도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런 놈이 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를 얌전하다고 생각한다.
달팽이의 이빨을 본적이 있는가/
난 보았다.
달팽이의 몸, 그게 몸인가?
달팽이가 기어다니다가, 뚜껑 대신인 랩에 기어갈때면, 위에서 보고 있는 나는
달팽이의 발바닥을 보는 셈이다.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발바닥이 아니라 입이었다.
입은 거의 보일 똥 말 똥인데, 입에 있는 것
이빨
정말 많은 이빨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이빨이 움직인다.
달팽이의 탐욕스러운 식성이 그 이빨을 보면서 이해가 되었다.
난 달팽이 의 발을 본 것을 자랑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달팽이와는 하등에 관계도 없는 ...
시에 정말 필이 꽂히면 그 때 다시 수다
시이야기.
묵힌다. 읽게... 좋으니깐 좀 묵힌다.
달팽이가 남긴 진액.
진액을 흘리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그들.
작은 몸에서 진액을 만들어내고 , 끊임없이 마른 바닥을 적셔가야만 조금은 움직일 수 있는 그들
그들이 업고 다니는 얇은 갑각은 진액의 힘으로 끌고 가기엔 남들이 뭐라건,
그들에게는 몇 톤의 무게이다.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미끄러운 땅보다 마르고 척박한 곳이 더욱 많다.
마르고 척박한 곳을 다니느라, 더 많이 흘리고 다녀야 할 그들의 진액.
진액들의 흔적.
작고 여린것이 남기고 간 흔적은 그냥 볼 수가 없다.
수고로움이니깐....
판자동네에 사는 할머니가 건네주시는 고구마 한 알은 나를 슬프게 한다.
코묻은 아이의 손이 주는 새우깡 하나는 나를 슬프게 한다.
껍질 땅콩속에 들어있는 아직 여물지 않는 땅콩은 나를 슬프게 한다.
늦은 밤,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편의점에 서서 먹는 컵라면은 나를 슬프게 한다.
잔디밭사이로 눈꼽보다 작은 흙을 가지고 가는 검은 개미의 허리는 나를 슬프게 한다.
이렇게 작은 것은 나를 슬프게 한다.
달팽이가 남기고 간 마른 땅 위에 진액의 흔적.
미끄러운 땅, 습기가 있는 땅에서는
말하자면 달팽이가 살기 좋은 그런 곳에는 진액의 흔적이 남을 리가 없다.
보이지 않은 만큼만 흘려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곳의 달팽이의 흔적은 슬플 리가 없다.
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제 몸에 있는 진액이라는 진액을
다시는 더는 갈 곳이 없는 것처럼 한 발자국을 움직이는 데 다 소모했을 달팽이.
얼마의 시간을 마른 땅에 머물면서 다음 진액을 짜내었을까?
더는 갈 곳이 없는 것처럼 흘려놓았을 진액의 흔적을 보면서,
끊어져 버린 진액의 흔적을 보면서.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을 본다.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가진 진액을 지금 서 있는 이 곳에 모두 흘려보낸다.
그리고 한 발자국을 나간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뙤양볕 아래라면, 내가 그 곳에서 진액을 만들어야 한다면,
다음 진액을 퇴양볕아래에서 만들어야 한다면.
내 등은 말라가는데. 그렇게 해야한다면, 아~
그곳이 습기가 촉촉하고 나무그늘이 있고, 여린 풀잎이 있는 곳이라면.
그렇다면 적은 진액만으로도 앞으로 갈 수 있다면, 그럼 아~
이 시는 나에게 그렇다.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곳이 어느 곳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런 시가 되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의 진액의 흔적이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라면, 그 곳을 지나 어느 지점에서 내가
되돌아보고 있다면, 그럼 다행이겠지.
기억되는 곳으로 남아있다면 다행이겠지.
진한 진액의 흔적이 남아있더라도, 내가 되돌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라면 정말 좋겠다,
흔적이 없어 보이지 않는 그런 길...
딱지가 되어 있는 길...
길이다.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난 진액의 양을 조절하면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걸음이 느리다면, 난 진액을 만들어가며, 짙은 진액의 흔적을 만들고 있는 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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