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시집[번개를 치다]에 폭 빠져있다.
오늘도 퇴근 길 전철에서 한 편의 시를 발견! 얼른 옮겨야지
-그을림에 대하여-
정병근
그는 어딘가 그을려 있다
불구덩이 속에서 반쯤 타다가 나왔다
사타구니에 우둘투둘한 화상을 숨기고 있다
입가에는 무언가를 구워 먹은 흔적이 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도 그을려 있다
그의 집은 그을음 투성이다
그는 벌겋게 불을 지피다가
집 한 채를 홀랑 태워먹은 적이 있다
방화의 혐의를 지울 수 없는 그의 얼굴
그가 앉았던 방바다과 그가 기댔던 벽과
그가 누워서 쳐다보았던 천장까지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그는 집 한 채를 버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가 버리고 온 빈집엔 지금 잡초가 무성하고
무너진 담장과 굴뚝과 기둥과 서까래가
햇볕에 한없이 그을리고 있다
그을린 곳마다 눈부시게 거미줄
그을음을 툭툭 털면서
그가 오래된 구들장을 열고 나온다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시인.
시인은 이 모든 사람일까?
그럴까?
난 이 시인이 이야기하는 왜 그 모든 사람이 되는거지?
왜 그 모든 등장인물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는거지?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있는 그런 여자. 난 그을음을 쓰고 ....
"내가 불장난한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
"없지?"
누구도 내가 불장난을 한 것을 본 사람이 없다.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의 불장난은 완전범죄를 꿈꾼다.
난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아마 나에게 불장난의 흔적 따윈 없을거다.
난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아. 그렇지. 난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야...
시치미를 뚝 떼고 들른 이른 아침 해장국집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에 어렴풋이 그을음이 묻어있다.
아니겠지. 절대 아니야, 내가 그렇게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야
해장국이 나온다.
불장난을 한 다음날은 해장국이 좋다. 시원하게 식혀주어야 한다.
난 해장국을 한 그릇 깨끗이 비운다.
나를 식혀주었다.
나에게는 더이상 불장난의 뜨거움은 남아있지 않다.
5000원짜리 해장국으로 깨끗이 정리되었다.
난 이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왜 보는걸까?
사람들이 왜 나를 보는걸까?
절대 그럴리가 없어, 난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아...
그런데 왜 불안하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왜 불안하지?
내 불장난을 알고 있는것일까?
사람들이 나를 보면 난 불안하다.
완전범죄가 되지 않을 듯한 마음때문에 불안해진다.
절대 그럴리가 없어, 난 그렇게 어수룩하지 않아
내 옆을 지나는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불이 났다고, 어젯밤 누군가의 불장난때문에 집한채가 다 탔다고,
그리고 그 안에 사람도 있었다고,
그 집도 그 사람도 아직도 타고 있다고,
냄새가 진동하도록 아직도 타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한다.
나를 본다. 나를 째려본다.
아직도 그 집이 타고 있다고?
아직도 그사람이 타고 있다고?
난 전신거울을 본다. 나의 전부를 본다.
나의 구멍들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그을음이 아니라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도 아직도 타고 있었다.
지난밤의 불장난은 아직도 나를 태우고 있다.
언젠가 내가 다 타는 날, 난 또 다시 해장국을 먹으러 올 것이다.
온 몸이 비치는 전신거울 한 번 보고, 내가 남긴 불씨가 없나 확인하고
그리고 나서 해장국을 먹으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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