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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사람 떠난 집

by 발비(發飛) 2005. 7. 1.
 
지난 봄 강화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람이 떠난 집에 남아 있는 것들은 사람이 떠나자 집을 지키고 있는 것들은
원래의 주인이다. 사람이 떠나자 다시 돌아왔다.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집이다.
원래는 길이 있었겠지만, 사람이 떠난 집에는 길도 같이 떠난다.
길은 없었다. 없는 길위로 풀들을 헤치고 집 앞으로 갔었다.
 
 
 
전철에서 정병근의 시집을 읽다가 이 사진이 문득 생각났다.
이 사진을 생각나게 했던 시를 같이 올려본다
 
풀을 인 대문이 있는 집
 
정병근
 
파란 대문 위 시멘트 옥상에
풀 한 다발 자라고 있다
바랭이 쑥부쟁이 개망초 강아지풀......
다산의 깃발을 꽂고 흔들리는 풀들
 
그 집 문간방에는 겨드랑이에 검은 반점을 가진
늙은 여자가 살고 있다 파자마 바람으로
마당을 서성거리는 주인 남자도 있다
뼈아프게시리, 가난한 상처만 골라 파고들고
 
산들산들 흔들리는 대문 위의 풀들
집을 비우는 순간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올 풀들
사흘에 한 번 들어오는 젊은 아들이
까닭 없는 살의를 키우는 동안,
 
길보다 낮은 마당에 응달이 자꾸 차 올라
슬레이트로 덧댄 지붕 틈새로
파란 하늘이 목만 빠끔히 내놓고 있다
 

 
 
모든 것이 멈추어진 집.
아니다. 멈추어진 것은 없었다.
내가 들여다 본 대문 안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개나리는 꽃을 피웠다가 이미 초록잎을 내고 있었고,
강아지풀은 작은 바람과 살떨리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흔적 없애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썩을 수 있는 것들은 자신을 썩히고 있었고,
날릴 수 있는 것들은 자신을 날리고 있었고,
이도 저도 안되는 것들은 햇빛에 자신을 바래기라고 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떠난 자리라고 멍하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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