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기 전에 퇴근을 했다.
가방엔 카메라가 있었다.
비가 한 줄기 내려서 사방이 촉촉하고 선명하다.
매일 직행하던 길을 버리고, 난 아파트의 화단을 돌아보기로 했다.
오래된 서민10대 아파트의 화단은 달리 심어두는 것이 없다.
나무는 울창해 적당한 크기의 꽃들은 자라지 못한다.
바닥에 짝 깔려있는 풀들이 많다.
아예 쪼그리고 앉아서 뭐가 있나 보기로 했다.
풀만 있는 줄 알았던 곳에 아주 아주 작은 꽃이 피어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바로 아래 나처럼 작은 꽃이 피어있었다.
카메라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꽃이다
(난 요즘 zoom을 안쓴다.)
(어떤 분이 사진 찍을 때 zoom을 쓰지 말고 몸이 다가가보라고 말씀해주셨는데,)
(다가가는 느낌이 아주 좋아서 요즘은 내가 zoom이다)
이렇게 작은 꽃에 가까이 간 것은 거의 코를 박았다고 봐야 한다.
또 이름은 모른다.
다만 예쁜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옆에 긴 꽃이 피어있다
꽃이 아닌 줄 알았는데, 또 코를 박고 보니 분홍빛 눈꼽보다도 더 작은 꽃잎이
달려있다. 그래서 꽃이다. 예쁜 꽃은 아니지만, [아닌척하는꽃]이라고 부른다.
얘도 나를 닮았다.
[아닌척하는꽃] 꽃이면서 꽃이 아닌척하는 꽃.
나도 아닌척하는데. 때로는 센 척, 때로는 약한 척.
나 닮은 작은 꽃
나 닮은 아닌척하는꽃
둘 다 오늘 내 손에 걸렸다.
만나서 반가웠다. 그리고 나를 따라와줘서 고맙다.
예쁜 꽃! 그리고 아닌척하는꽃!
꽃들을 보면서 아파트 화단으로 깊이깊이 들어갔다.
아파트 화단 깊숙한 곳에 토마토를 누군가 심어두었다.
세상에 이렇게 이쁜 토마토를 ...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그리고 꽃을 떼어내지도 않은 토마토가
열려있다.
정말 호적에 잉크도 안 말랐다고 하더니
꽃잎도 떼지 않는 토마토가 열려있다.
꽃잎이 달려있는 토마토가 대견해서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건 내 생각인 것 같아 만지는 것은 그만두고
토마토의 영상만을 데리고 오기로 한다.
토마토 앞으로 자라있는 토마토잎을 손으로 내리고 선명하게
찍는다.
최대한 다가가서...
다가가는 순간 토마토의 젖내가 난다.
토마토의 젖내는 토마토의 냄새가 아니라 토마토잎의
냄새이다.
마치 쑥냄새 비슷한 토마토 젖내가 살짝 스친다.
너도 만나서 반가웠다. 뉘가 주인인지는 모르지만 잘 자라서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라..
꼭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라..
앉은채로 뒤를 돌았다.
꽃인줄 알았다.
빨간 꽃이 이뻐보여서 찍으려고 카메라를 갖다대었다.
아니다!
카메라를 내리고 다시 보니, 딸기다. 맙소사!
아파트 단지 중의 오지에 딸기가 있었다니.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딸기가
있었다.
잘 보니 딸기는 하나가 아니라 수십개다.
빨간 딸기가 손톱보다 작은 딸기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딸기가 있는 아파트,
딸기밭 아파트
딸기아파트
갑자기 이쁜 아파트가 되었다.
빨간 딸기 덕에 마치 시인아파트가 된 기분이다.
작고 허름한 그런데 빨간 딸기가 열려있는 그런 곳 영화의 한
장면같다.
시적인 장면이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물이끼가 끼어있지만, 그 밑으로 낮게 열려있는 빨간
딸기
이즈음이면 물이끼도 초록배경으로 승격이 될 것이고
벗겨진 페인트는 입체감을 나타내주는 마치 설치미술같은 느낌이
된다.
그 아래 점점히 빨갛게 열린 딸기.
와!
멋진 그림이다.
지금 난 그림위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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