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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내 속에서 뭔가 말하는데... 들어보자

by 발비(發飛) 2005. 6. 8.

이 이야기부터 들어야겠다.

이번 여행에선 할 이야기가 무척 많지만, 도무지 다른 이야기들을 쓸 마음이 안 생기는 것은

내 속에 한 이야기가 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묵직함 찝찝함의 정체가 아무래도 이 이야기같다. 떨쳐지지 않으니 들어볼 밖에....

 

노추산.

우리가 간 산장옆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다.

그 오두막에는 올해 93세 되신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물론 작년에도 살고 계셨다.

가족도 없이 혼자서 살고 계시는데, 그 분은 하루에 너구리 반 개를 끓여드시며 살고 계신다.

작년에 그 분을 처음 뵈었을 때(안개낀 새벽이었다) 그 분은 도인 같은 모습이었다.

해가 지면 주무시고 그러니 저녁7시정도일 것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시고 그러니 새벽 4시경이 된다.

 

그리고 그 분의 첫 마디는 율곡선생을 모신다고 하셨다.

세상 돌아가는 말씀을 하시면서 득도한 모습을 보여주셨다.

사실 난 그 분이 그런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지난 일년동안 난, 언제가 읽었던 이외수의 소설에 나오는 그런 할아버지..

딱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기다리면서 소설 속의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떠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1년만에 다시 뵌 그 할아버지는 도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단지 무의탁노인이었을 뿐이다.

작년에 할아버지는 우리가 드리는 음식을 안 드셨었다.

그리고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맛난 음식을 탐하는 우리들에게 뭐라고도 하셨던 것 같다.

그랬는데...

맛난 과일을 주는대로 드시고,

반찬과 밥을 마다하시지 않으시고,

자신의 방을 내 놓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이게 뭘까? 난 생각했었다.

작년에 할아버지는 우리가 피워놓은 모닥불에 친히 납시셔서 이야기를 해주셨고

우린 그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일도 맞추신걸로 기억한다.

차마 우리들은 할아버지의 집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이런 마음을 뭐하고 이야기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속이 상하다. 93세 된 할아버지가 이젠 정말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간 분들이 할아버지는 씻겨드리고, 청소해드리고, 나무를 해드리고, 음식을 드리고,

할아버지는 마다하지 않으신다. 좋아라하신다.

내가 계곡에 갔다오니  집안을 청소하고 있었다.

놀랬다. 몇 십년만에 집이 홀딱 벗고 있는거다.

할아버지도 목욕을 시켜드렸으니 똑같았을 것이다.

나도 할아버지의 그릇을 설거지했다. 덕지덕지 붙은 몇 십년된  음식찌꺼기를 씻으면서

비위가 상하면서도,,,, 그러면서도 단지 설거지가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모두 멈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깨끗이 씻으신 할아버지는 사진도 찍으시고...

그것도 꽃밭에 앉으셔서 활짝 웃으시면서...행복해 하셨다.

좀 슬펐다. 아니 두려웠다.

우린 2박 3일을 있다가 나왔다. 회오리바람처럼...

도인이셨던 할아버지는 매일 노추산을 오르시면서 율곡선생님과 대화를 하시면서 소일하셨지만,

이제 더는 도인이 아닌 할아버지는 율곡선생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모두들 참 잘 해 드렸다.

그런데 회오리바람처럼 다 떠나간 뒤는 어떻게 되지?

맛난 과일이 또 드시고 싶으면 어떡하지?

더는 너구리라면 반개가 성에 안 차시면 어떡하지?

난 지난 일년동안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할아버지가 사람에게 정을 붙이셨을까봐 걱정이 된다.

난 그런데..

며칠동안 혼자서 잘 지내다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즐겁다보면

그 다음날은 혼자 있기가 무지 싫어지는데, 그래서 만날 사람을 찾게 되는데...

할아버지는 그렇지 않을까?

난, 그리고 우린 젊어서 견딜 힘이 있는데,,, 할아버지는 견딜 힘이 있으실까?

떠나오는 날 아침 몰래 본 할아버지는

작년에 새장가가 가고 싶다던 그 도인 할아버지, 좀은 무섭던 그 할아버지가 아니라

단지 무의탁노인이었다.

 

 

모든 인간의 삶은 똑같은 것이라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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