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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1-1

by 발비(發飛) 2005. 6. 2.
LONG
흐음생각
 
 
난 이 책을 내 마음대로 자유스럽게 읽으려고 한다.
내가 느껴지는대로, 마치 100년전 사람에게 강의를 듣는다고 생각하고 듣는다.
릴케는 시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모든 진리는 다르지 않는가보다.
삶에 대입시켜도 너무 딱 들어맞는다.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 보고 계십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 뭔가를 해본 적이 있냐고 되물어보았다.
옷을 입는 것, 책을 보는 것, 일을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어쩌면 내가 나를 밖에서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타인에게서 나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그렇다. 타인의 말에서 나의 실마리를 풀려고 한다.
안에서 엉킨 실을 밖에선 풀어지지 않는데, 그래도 밖에서 실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기고만 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십시요.
 
그럼 나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나?
릴케는 답도 주었다. 안에서 실이 엉켰다고 해서 안에 있는 실을 마구 당기면 결과는 같다.
안에 있는 실의 길을 조용히 따라 가보아야 한다. 어디로 가서 실이 헝클어졌는지,
조용히 실의 길을 따라가야만 실을 끊지 않고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런 걸 몰랐을까?
내 속 들여다보기
 
당신은 당신의 생애을 이 필연성에 의해 세우십시오.
 
릴케는 또 말한다.
자신을 철저히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히고 나면 보일 것이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절실함이 곧 필연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필연과 당위가 나에게 씌워질 것이다.
철저한 고민없이 '난 그런 사람같애' 그런 것은 나를 끝까지 몰아갈 수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듯 싶다. 난 릴케의 말을 그렇게 들었다.
 
당신은 자연에 근접하십시오
 
산과 들과 바다와 강.... 보고싶다.
단지 보라는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염두에 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거다.
항상 자연을 염두에 두고 있어라... 해바라기가 태양이 떠도 뜨지 않아도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것처럼 그렇게 자연을 향해서 머리를 들고 있으라는 이야기이겠지.
붕뿡거리는 자동차를 보면서도 시골의 어느 저녁 굴뚝을 생각하고,
아파트의 보이지도 않는 하수구 공기통을 보면서는 올챙이 놀던 또랑을 생각하고
남산타워를 보면서 동해바다 어느 곳의 등대를 생각한다면,
그래 멋진 인생을 살게 되는 거구나
 
창조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버려도 좋은 빈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얼마나 멋진 말인지...
레이다가 너무 많이 달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사람에게서 실망을 많이해서 사람보다는 말이 없는 사물에 더 관심이 많나보다 했다.
봉사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면서 근본적인 모성은 있어서 길가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모으나 생각했다.
릴케의 이 말은 그냥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의도하는 바는 다르지만, 난 세상에 어떤 빈약한 장소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이라면....나만의 독립국가라면...
 
안으로의 전환에서, 자기 세계속으로의 침잠으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가 좋으냐고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겁니다.
 
찔린다.
자신의 속으로 깊이 빠져보라는... 자신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까지 내려가 그 곳에서 무엇이 들리는 들어보라는 그의 말은 정말 나를 찔리게 한다.
내 속에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잘 들어보는 일
내 깊은 속에서는 내가 나쁘지도 않고 이상하지도 않고 꾀를 부리지도 않고
나의 저 밑바닥은 나에게 뭔가 진실을 말해줄 건데..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묻는다.
어때요? 어때요? 나 어때요? 이 옷 어때요? 이 가방 어때요? 이 블로그 어때요?
그렇게 남들에게 묻는다.
그들은 대답한다. "괜찮네요.." 그럼 괜찮겠지... 그것으로 안심한다. 바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의 보상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말고 그 무겁고도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가라.
어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것이 힘든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서 그런 것이라고...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주신다고...
내가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가는 것은,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신부님께 말했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십자가 지고 가는 것 싫다고.. 그리고 지금도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싫다. 무겁다...
신부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럼 어쩌라고...  그냥 지고 가라고...
그런데 릴케도 그런 말을 한다. 그냥 지고 가라고...
내게 무거운 짐이 있기는 한 걸까?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자기로의 복귀는 전연 무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릴케가 이야기한다.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가서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아닌지 알아보라고...
그런데 알아보니 지금 가는 길이 아니라는 자신의 소리를 들었다면 어쩌라는 것이냐///
릴케는 말한다. 설사 그렇다 해도 자신에게 아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알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길이 아닌데 가는 그 버거움을 덜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길을 지금이라도 찾을 수 있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가장 은밀한 시간에 당신 내심의 느낌을 통해서만이 해답을 내릴 수 있는 의문에 대해서, 밖을 향하거나 외부로부터 그 해답을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만큼 당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가장 은밀한 것, 그건 결국 나밖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밖에서 구하려고 한다.

인정하기 싫을 경우, 그리고 확신이 필요한 경우....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에게 핑계거리를 만들어준다.

방어자세를 만들게 된다. 공격하지 못하고 운명에 대해 방어만 하게 된다.

방어라는 것은 결국 빠져나갈 구멍을 말하는 것일텐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삶

그 절실함의 강도는 다를 것이다.

릴케는 절박함이야말로 자신의 발전에 가장 강한 원동력이 될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절박함... 도망갈 구멍조차 없는 곳에서의 공격.... 그건 딱 두가지겠구나.

삶 아니면 죽음.


ARTICLE

범우문고 56번 가격 2000원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책을 지난 토요일에 샀다. 릴케를 알아보고자 함이다.

2000원짜리 책에 이런 편지가 있다니... 이건 삶에 관한 문제였다.

그래서 짬이 날 때마다 두드려놓으려 한다.

항상 그렇듯 나의 머리를 믿을 수가 없으므로, 손에게 기억을 맡기기 위해서

천천히 읽고 싶은 글일 듯 해서 천천히 두드려 나갈 것이다.

 

 

젊은 시인에게

 

파리에서

 

1903년 2월 17일

 

보내주신 편지는 수일 전에야 받았습니다. 편지에 담겨진 관대하고 친절하신 저에 대한 신뢰감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그 이상 뭐라고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로서는 당신의 시 속에 파고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어떤 비평적인 견해라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으로는 결코 예술작품에 가까이 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 하든 비평에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모든 사물은 우리들이 믿고 싶은 이상으로 이해할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건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나며, 무엇보다도 예술 작품은 이러쿵저러쿵 비판할 수가 없으며 스쳐 지나가는 우리들의 보잘것없는 생명과는 달라서 영속적인 것이고 신비에 찬 존재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며 저는 한가지만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당신의 시들은 개성에 도달하는 은밀하게 숨겨진 씨앗은 보이나, 독자적인 양식은 지니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일 마지막의 <나의 영혼 속에서>라는 시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무엇인가 독자적인 것을 언어와 운율로 나타내려고는 하고 있습니다. <레오파르디에게 부치는 헌시>라는 아름다운 시 속에서도 그 위대하고 고독했던 분과의 친근감이 자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취할 게 없으며 독자적인 게 없습니다. 마지막 시나 <레오파르디에게 부치는 헌시>에서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동봉해주신 편지는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무엇인가 막연한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가 좋으냐고 묻고 계십니다. 제게 묻고 계십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도 물으셨을 것입니다. 잡지사에 보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와 비교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편집자가 당신의 작품을 돌려주면 불안감을 느끼십니다. 충고를 드려도 좋으시다고 하셨으므로 감히 말씀드리는 데, 제발 그런 일은 이제 그만두도록 하십시요. 당신은 자기의 밖을 내다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충고를 해주거나 당신을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십시요. 그리하여 당신께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리고 그 쓰고 뻗어나오고 있는지를 알아보시고, 만일 쓰는 일을 그만들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이런 의문을 우선 조용한 밤에 자문해 보란 말입니다. 나는 쓰지 않으면 안 될까? 그러고는 마음 밑바닥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에 귀를 기울리도록 하십시오. 만일 그 대답이 그렇다고 하거나 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해 명확하고 확고한 대답을 내릴 수 있거든, 당신은 당신의 생애을 이 필연성에 의해 세우십시오. 당신의 생활은 비록 아무렇게나 다루어지거나 쓸데없는 순간도 그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연에 근접하십시오. 그런 다움에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로 말로 표현하도록 노력해보십시오.

사랑의 시는 쓰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선 흔히 있는 일상적인 형태는 피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것입니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훌륭하고 빛나는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 숱하게 많은 형편에 독자적인 것을 나타내자면 보다 힘차고 무르익은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즐겨 택하는 보편적인 주제는 피하고 당신 자신의 일상 그리고 무엇이든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의 일상이 주는 주제를 선택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열망 그리고 무엇이든 아름다움에 대한 당신 자신의 스쳐가는 생각이나 믿음을 묘사하십시오. 그것들을 내심에서 울려오도록 은근하고 겸손하게 묘사하십시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 당신의 꿈의 영상, 추억의 대상들을 인용하십시오. 당신의 일상이 비록 빈약하게 보일지라도 그걸 탓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탓하십시오. 즉 훌륭한 시인이 못 되어 그 일상의 풍요로움을 불러낼 수 없음을 자책하십시오. 창조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버려도 좋은 빈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당신이 감옥에 갇혀서 외계의 소음조차 당신의 의식에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어린시절의 귀중하고도 풍요한 추억의 보고라는게 있지 않습니까? 거기로 주위를 돌리십시오.

지나간 아득한 과거의 가라앉은 감동을 다시 캐내보려고 애쓰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굳어지고 고독은 넓어져서 어두컴컴한 방이 될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는 시끄러운 소음은 멀리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으로의 전환에서, 자기 세계속으로의 침잠으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가 좋으냐고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겁니다. 또한 잡지사에 보내 그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려고 애쓰지 않게 됩니다. 그저 당신은 자기 작품속에서 자랑스럽고도 자연스러운 재화, 즉 자기생명의 한 편린, 그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의 원천에 의해서만 시가 좋으냐 나쁘냐 하는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이것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파고 들어서 당신의 생명이 근원한 그 깊이를 음미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 원천에서 부터 창작을 해야 할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해답이 어떻든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모르긴해도 당신은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하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외부로부터의 보상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말고 그 무겁고도 힘든 짐을 지고 가십시오. 창조자는 그 자신이 하나의 세계이어야만 하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어울려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을 찾아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 속, 즉 당신의 고독 속으로 파고들고도 시인이 되겠다는 것을 단념해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앞서도 말씀드리지만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제가 말씀드리는 바는,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자기로의 복귀는 전연 무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신의 생활이 어떻게 된든 거기서부터 독자적인 길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휼륭하고 풍요로우며 양양한 대로가 되기를, 저는 말로 나타낼 수 있는 이상으로 바라고 있다.

더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할말은 다 한 듯 싶습니다. 끝으로 다시 한번 당신께 충고할 것이 있다면, 조용하고 진지하게 당신의 발전을 통해서 성장해가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가장 은밀한 시간에 당신 내심의 느낌을 통해서만이 해답을 내릴 수 있는 의문에 대해서, 밖을 향하거나 외부로부터 그 해답을 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만큼 당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편지 속에서 호라체크 교수님의 존함을 보게되어 기쁩니다. 저는 아직도 그 고매하신 학자님에 대해 경외와 해를 두고도 변함없는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충정을 제발 그분께 전해주십시오. 그분께서 아직도 저를 기억해주시고 계신 점에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믿고 보내주신 당신의 시들을 다시 회송합니다. 당신이 저를 믿어주신 관대한 진심에 대해 거듭 감사드리면서, 낯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제가 아는바대로 믿어주신 점에 대해 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충정과 변함없는 관심을 갖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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