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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황지우]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by 발비(發飛) 2005. 5. 27.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먼 눈으로 술장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이 시를 언제 보았지?

생각해보니, 아마 스물 다섯쯤이었던 듯 싶다.

연년생 동생이 사들고 온 황지우의 시집...

동생은 글에 재주가 있었다.

그 시집을 읽어보고는 '이게 다 무슨 말이야' 도무지 알 수 없는

기호들의 조합이었다.

한 권의 시집 중, 내가 알 수 있는 아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알아듣기는 커녕 마치 글을 모르는 아이처럼 읽을 수가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에도 황지우는 그렇게 나에게 기억되는 시인이다.

단 한권의 시집도 읽어보지 않았으며,

그의 시 한편도 읽지 않았다. 거부감...

뭔지 모를 소리만 하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

마치 외국인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것처럼 그를 피하고 싶었다.

어제 우연히 시모음집에서 바로 그 시집의 제목이었던 이 시를 만났다.

 

아!!!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 때 [문자해독불능]이라는 판정을 받은 이 시가

뭔지는 모르게 이리 가슴이 짠하게 아픈것은

아마 늦된 나의 정신적 연령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가 시간을 보내는 것, 폐인이 되는 것을 피해

흐린 주점을 찾아들 듯

나도 그를 따라 뿌연 주점을 찾아나서고 싶다는 동조를 보낸다.

늦된 삶,

도대체 늦된 삶.

 

 

동생이 오면 물어봐야겠다.

너는 그 때 이 시가 읽히더냐고?

너의 나이 스물네살에 너는 읽히더냐고?

이젠 물어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 때 묻고 싶었지만,

못 알아듣는 내가 바보같을까봐..그만두었던 것을

이제는 물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찬바람이 분다.

오늘 같은 날 흐린 주점에 앉아

뿌옇게 올라오는 오뎅국물을 앞에 두고

그것으로 방패삼아 테이블 건너의 황지우랑 이야기 하고 싶다.

뿌연 오뎅국물로 방패를 삼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도

방패가 필요한 ... 나 그리고 우리들.

 

언감생심....

 

하지만, 다행이다.

홍상수감독도, 연기를 하던 김상경도 , 시를 쓰는 황지우도,

그리고 우리 사장님도 모두 같은 것 같으니까....

 

이 시를 [극장전]아래에 붙이고 싶었다.

왜? 모른다. 극장전을 생각하면서 같이 떠올랐으니까... 내가 어찌 알리오. 나의 마음을...

 

그래도 아~ 다행이다. 나만 그런게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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