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랐다고 해야하나 여물었다고 해야하나
꽃 피우고 꽃잎 진 마른 자리에 씨가 잔뜩 들어앉아있다.
손가락을 종지모양으로 말아 꽃대부터 훑었더니 손바닥에 무게도 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무게도 없는 것들이 똘똘 뭉쳐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꽃씨들은 각각의 꽃진 꽃대에 잘 싸여있다.
나는 두 손바닥을 쫙 펴고 빙글빙글, 좀 더 작게, 좀 더 단단하게 말았다.
집에 갈 때까지 하나라도 이탈, 떨어지지 않도록 할 속셈이었다.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 동안 아마 내 삶에서 가장 많은 꽃들을 보았던 것 같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집으로 달려 들어가기 바빴고, 약속장소로 뛰기 바빴던 와중에도 꽃들이 있었다.
바쁜 걸음을 걸었던 뒤통수에도, 지금도 알록달록한 갖가지 모양들이 잔영으로 남아있다.
그 사이 꽃씨를 움켜잡았는지, 동그랗게 말아둔 씨들이 손바닥 다닥다닥 붙어버렸다.
꽃씨들은 꽃대에서 이탈했다.
너무 작아 손가락으로 떼어내지도 못할 지경이다.
집으로 와 책상에 종이를 깔고 두 손을 마주 비벼 꽃씨들을 떼어냈다.
두 손을 마주 비비는 김에 소원 하나도 빈다.
'내년에는 환한 꽃으로 만나게 해 주세요.'
몇 개 정도는 탈락했겠지만, 제법 많은 씨들을 작은 봉투에 넣고는 '꽃씨'라고 썼다.
사방에 마른 꽃 천지다.
여름의 끝은 가을의 시작은 말라버린 것들로 시작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한다.
농사라고는 1도 모르는 사람인 나의 생각엔 벼와 사과나무의 기준이 아닐까 했다.
참 많은 것들이 봄에 심어서 여름에 끝나고, 가을에 시작해서 겨울에 끝나는 것들이었다.
다음 주엔 상추, 오이, 토마토, 가지, 호박, 옥수수 같은 것들을 텃밭에서 모두 걷어내야 한다.
그리고 배추와 무를 심어야 할 때라고 했다.
낙동강 수변 공원에는 봄에 활짝 피었던 금수국과 목단, 작약 같은 것들이 피었던 자리에 코스모스가 싹을 틔워 한 뼘 만큼 자라고 있다.
대부분의 것들이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로 짝을 이룬 생태계였다.
숲을 이룬 높은 곳 아래, 땅 가까운 곳에서는
두가지 세계가 순서를 바꿔가며 질서정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끝여름은 그런 세상이 교차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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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땅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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