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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로비] 바닥에 떨어진 나침반

by 발비(發飛) 2023. 1. 14.

설날이 되지 않은 23년 1월에 나의  위치에서는 방향 가늠이 안 된다는 듯이 나침반이 팽팽 돈다.

심지어 나는 이미 어떤 낯선 건물로 들어와 로비 한 가운데 서 있는데 말이다. 

건물에 들어왔으나 목적지가 아닌 로비에 기억상실증처럼, 치매환자처럼, 어린 아이처럼 둘러볼 뿐이다. 

 

지하에는 사우나가 있고

1층에는 카페가 있고, 

잠잘 곳이 있고,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 있고, 

근사한 식사를 하는 곳이 있고

미화원들이 수다를 떨며 들어가는 복도도 있다. 

 

높은 사방 벽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들의 사진과 초상화가 걸려있다. 

가족사진이 있고, 나혜석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함께 일했던 상사가 있고, 동료가 있다. 그리고 내가 그린 여자들도 있다. 

 

나침반은 여전히 핑핑 돌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어제 일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마 내가 이 건물에 들어온 것은 어제 일 때문일거다. 

 

언젠가부터 몸의 어느 구석에서 조용히 피가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기증이 심해지고, 약간 멍한 상태였다. 아마 출혈이 계속되어 생긴 증상인 것 같다. 

지탱할 정도는 되었으나, 어제 일로 출혈에 가속이 붙는 듯 하다. 

 

어쩌면 나침반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팽팽 도는 것은 지극히 나를 중심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너의 상태로는 방향을 잡기 힘들어. 

방향을 몰라서라기보다 너의 상태가 문제인거지. "

그럴수도. 

 

살다보면 될 줄 알았지.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안 된 적이 더 많았어도, 늘 나는 될 줄 알았지 한다. 

그 마음으로 냉큼 이 거대한 건물의 로비에 선 것은 아닐까?

수많은 방들 중 어느 방에 가고 싶다는 의지도 없이, 

비도 바람도 낯선 사람도 피하고 보자고 로비로 덜컥 들어섰다. 

 

나는, 상처를 받았나.

피가 흐르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하였나. 

 

"보라, 모든 눈을 부릅뜨고 보라." -조르쥬페렉의 [인생사용법] 중에서, 쥘 베른 [황제의 밀사] 인용

 

내 눈이 풀리도록 허락하지 말라. 

 

사방에 걸린 사진과 그림의 눈들은 나를 응시한다.

눈을 맞추고자 한다. 

눈을 맞추기엔 내 눈은 이미 풀어졌고, 힘이 없어 이내 눈꺼풀을 내리고 만다. 

눈꺼풀이 내려감과 동시에 고개도 내려간다. 

돌덩이같은 머리의 무게에 툭 떨어지고 만다.

가슴보다 아래, 허리보다 아래, 허벅지보다 아래, 무릎보다 아래, 결국 발옆에 거꾸로 심고서야 추락이 멈춘다. 

 

건물과 로비와 로비에 걸린 사진과 초상화들은 더 없이 높기만 하다.

나침반은 여전히 팽팽, 온 세상 에너지는 나침판으로 모였다. 

파킹한 채 헛도는 엔진처럼 곧 심한 매연이 품을 지도, 나침반을 끝내 버릴지도,

무용지물이라고 원망하며 마지막 남은 힘을 나침반을 버리는데 쓸지도 모른다. 

지금 상태라면...., 그렇다. 

 

어느 날의 파티가 화려했고, 북적거렸던 사람들의 체취가 낮게 깔려있고. 

여전히 어디선가 분주히 움직이는 발자국소리가, 

수없이 많은 문들이, 엘리베이터가,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는 소리가,

바닥에 붙은 코로 귀로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바닥에 기댄 머리와 감은 눈은 무게를 잃어버려 차라리 편한데,

이 냄새를 이 소리들을 아는 척해야 하는가?

 

로비 바닥에 떨어진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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