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4년 쯤전, 줄창 신고 다니던 힐이 있다.
그때 저자들의 대부분이 정장을 하는 사람들이라 나도 대부분 정장을 입고, 가지고 있는 힐 중 가장 편했던 터키블루색에 가까운 그 힐을 줄창 신고 다녔었다.
그 사이 나는 발가락뼈가 부러져 두 달동안 깁스를 했고,
한 달 좀 넘게 산티아고 길을 걷느라 발목에 이상이 생겼고,
요즘은 만나는 저자의 대부분은 아주 편한 차림의 작가들이라 거의 슬립온을 신고 다녔다.
가을이 들어서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깔끔한 정장에 구두를 신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마침 학교에 수업이 있는 날인데, 학생들이 <질투는 나의 힘>에 나오는 배종옥의 복장처럼 편집자는 늘 캐주얼한 복장에 슬립온과 같은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고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며 오늘 아침 몇 년만에 터키블루색 힐을 꺼냈다.
내가 선택한 지옥의 시작이었다.
늘상 신었던 구두인데, 발볼이 좁지도 않은데 좁고, 높지도 않은데 높은 것 같고, 어느 한 곳 불편하지 않은 곳이 없는 그야말로 지옥이다.
멀쩡하던 세상이 구두 한 켤레에 지옥이 되고 말았다.
이상한 것은 나는 그동안 체중도 늘지 않았고, 키가 커지지도 않았고, 몸의 사이즈에 관한한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구두때문에 생긴 지옥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그리고
지난 주말 채널을 무료하게 이리저리 돌리다가 홈쇼핑에서 참 구태의연하게 생긴 구두를 충동적으로 주문했다.
주문취소를 하고 싶었지만, 귀찮아서 냅두고, 바빠서 냅뒀던, 기대도 안하고 잊어버렸던 구두가 택배로 도착해 있었다.
박스를 여는 순간, 홈쇼핑이 그렇지 뭐. 다시는 이러지 말자! 하며 신어나 보자! 했다.
그런데 터키블루색 힐과 비슷한 높이에다, 앞이 조금 클래식(말이 좋아)한데 푹신한 것이 거의 운동화를 신은 것 같다. 천국구두다.
신어보자 하고 신은 구두를 지금까지 집 안을 신고 돌아다닌다. 푹신한 구두. 천국구두.
제법 비싸게 구입했던 지옥구두는 지옥이니까 재활용쓰레기통에 버릴거다.
비록 좀 거시기하게 생겼지만 아주 디테일하게 보는 사람에게는 쬐끔 머쓱하더라도 나는 나만의 천국구두를 신어야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스무살에 탠디라는 브랜드에서 산 구두를 처음 신었을 때
뒤꿈치에 피가 철철 나도, 발가락마다 물집이 모두 잡혀도, 그것이 마치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인 것처럼 경건하고도 굳센 마음으로 수없이잡힌 물집을 겪은 뒤, 굳은 살이 박힐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을 구두에 맞췄었다. 온 힘을 다해 구두에 내 발을 맞췄다. 어떻게 그걸 했지?
참 잘 참았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 참을성이 많아진다는 의심에 여지가 있다. 아이때가 훨씬 더 잘 참았다.
나는 나를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고통스럽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게 어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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