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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정병근] 희미한 것에 대하여

by 발비(發飛) 2016. 2. 21.

희미한 것에 대하여 


정병근


거울의 뒷면은 깜깜한 어둠이다

쨍그랑 하고 깨어지는 것은 어둠 때문이다

선명한 것의 배후에는 칠흑의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어릴 때, 별을 보면

선명하게 빛나는 별 옆에 희미한 별빛 있었다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그러나 다시 빛나는 눈 밖의 빛


내 사랑은 대체로 희미하였다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누군가가 있었을 뿐

너를 눈앞에 두고도 나는

눈 밖에서 부지런히 기억을 만들었다


선명한 것들은 나의 적이었다

선명한 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지웠고

나는 줄기차게 선명한 것들을 지웠다

희미한 사람들과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웃고 울었다 버스와 전철과 택시를 타고

희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희미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나 이제 희미해졌다

내가 그러했듯 지금쯤 너의 사랑도 희미할 것이므로

너의 눈 밖에서 나는 희미하게 빛날 것이다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그러나 분명히 있는, 저 눈 밖의 빛


어제는 토요일이었으나, 지방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책을 낸 지 십년은 지난 작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몇 번의 통화에서 그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시력을 찾을 수도 있다고 했다. 

안 보이니까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하다고도 했다. 


그를 보고 싶었다. 

일도 일이지만, 모두에게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희망을 가지길 바랬기때문이다. 

사장님께 함께 가자고 했다. 

아직도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혹시: 그러할 일은 없지만 만일에 -네이버사전


오늘 '혹시'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돈다. 

그는 혹시 어땠을까?

나는 혹시..., 무엇을 생각하고 있나.


시인의 말처럼 세상을 너무 똑바로 보았거나 세상의 뒤를 너무 많이 본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게 세상은 희미할 뿐만 아니라 형체가 사라진 곳이다. 

저녁 식사 약속을 하였지만, 그는 식사를 하지 못했다. 

안 보여서가 아니라 한 두달 뒤에 세상을 보기 위해 바깥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이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그의 앞에서 짬뽕과 군만두를 먹었다. 

짬뽕은 너무 짰고, 군만두는 기름이 너무 많았다. 


너의 눈 밖에서 나는 희미하게 빛날 것이다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그러나 분명히 있는, 저 눈 밖의 빛


분명히 있는 저 눈 밖의 빛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너의 눈 밖에서 나는 희미하게 빛날 것이다


시인의 시를 거꾸로 읽으며 나는 눈 먼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되기도 한다. 

이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엉망인 것처럼 그가 더 잊혀진 존재가 아닌 것도 아니고, 중요해지지도 않은 것 같은 오늘, 

어느 시인의 시를 자꾸 거꾸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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