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신의 방안에서 혼자 있을 수 없다는 한가지 사실에서 시작된다.
&
-블레즈 파스칼
새로운 직장에 출근을 하면서 차를 두고 버스를 타고 다닌다.
집 앞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을 뿐더러 내려서 회사까지 가는 길 또한 무지 맘에 든다.
아주 쬐끔 후진 상가를 지나 한강을 향해 가는 길 어디쯤인데, 오분 남짓 걷는 길이 좋아서
좀 늦어 뛰어야 하는 상황에도 저절로 속도가 줄여지는, 천천히 걷게 되는 길이다.
그리고 난 거의 앉아서 갈 수 있다.
좀 늦게!
6712번 버스도 그렇다.
제법 규칙적으로 버스가 온다.
그럼 적당한 시간에 맞춰 나오면 바로 버스를 타겠지만 어느 때부터는 버스가 금방 지나가더라도 아쉬워 하지 않더라는
놀라운 변화가 내게 일어났다. 최고지.
왜 좋은거지?
버스정류장에서, 그것도 바쁜 아침 시간에 버스를 기다린다는 것이 왜지?
심지어 오늘은 버스가 좀 늦게 왔으면 하고 바랬다는 것.
왜지?
그냥 한달이 넘는 시간동안 같은 시간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적은 없지만 그 중 몇 명은 대충 몇 번 버스를 타고 가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1002번을 타고 가는 30대의 통통한 외국인 남자는 아마 북유럽의 혈통인듯 했고, 항상 흰셔츠와 진을 입고 있는 깡마른 중년남자는 골초이며,
검은색 가죽가방을 들고 있는 중년여자는 아마 집안의 확고한 중심인 듯한 맏며느리의 포스가 느껴졌고,
흰 스포츠티에 반바지, 운동화를 신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건장한 남자는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만난다.
또...
이것이 이유는 아니겠지?
그럼 왜지?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내내 생각을 해 보았다.
이유는 없었다.
버스 안에서도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처럼 이미 낯이 익은 몇몇이 있다.
나랑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는 항상 머리를 조금 덜 말린 채 나의 다다음 정류장에서 탄다. 그래서 매일 서서 간다.
나보다 앞 정류장에서 타고 항상 뒷자리에 앉아있는 삼십대 초반의 여자는 항상 같은 가방을 들고 다닌다.
하얀 쇼퍼백인데 꽃 자수가 놓여있다. 창밖을 보거나 잔다.
또 카키거나 브라운 남방을 항상 입고 있는 남자는 핸펀으로 카툰을 정신없이 본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서...
어제 내 옆에 앉았던 청년은 오늘은 못 봤는데, 나와 같은 핸펀을 가지고 있으면서 엄청 부럽게도 문자를 초고속으로 보낸다.
지난 번에는 댄디한 옷을 입었었는데, 어제는 흰티에 반바지였다. 잘 어울렸다.
오늘 내 옆에 앉은 예쁜 아가씨는, 정말 이쁜데 전에 본 기억이 없는데, 화장을 열심히 했다. ㅎ버스나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는 아가씨가 대부분 꼴불견으로 보이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청순하게 예뻐서 그런 것 같았다.
이것도 이유는 아니겠지?
6712 버스를 기다리는 일도, 버스를 타는 일도 왜 좋은거지? 그것도 엄청?
'주절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Andy Weir] The Egg (0) | 2015.10.06 |
---|---|
음소거 (0) | 2015.10.06 |
'다시' 라는 말 (0) | 2015.07.13 |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0) | 2014.12.14 |
파란만장波瀾萬丈 (0) | 2014.12.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