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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누구라기보다 나야말로

by 발비(發飛) 2014. 11. 18.

 

 

허브차들을 담아놓은 병은 바구니에 담아 냉장고 위에 있었다.

캐모마일, 민트, 라벤다, 다즐링홍차가 담겨 있었더랬는데, 가끔 마음이 동하면 물을 데워 마셨다.

오늘 아침 문득 마치 보이지 않는 어느 도시처럼 차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었으나, 내게는 폐허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구니를 내려 허브차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빈병들을 보니, 병의 바깥쪽은 먼지와 손때가 묻어 더덕더덕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차들을 꺼냈을 뿐인데, 병이 더 끈적인다고 느껴지는 거다.

세제를 넉넉히 풀어 병과 병을 담고 있던 바구니를 꼼꼼이 씻어 말리기 위해 선반에 걸어뒀다.

그리고 병을 씻어 설거지 선반에 올려두려하였는데, 손이 바구니를 향하는 거다.

서로에게 어떤 연이 그동안 있었는지, 둘이 서로를 당긴 듯했고, 내 손은 힘없이 그들의 힘에 끌려 원하는 대로 해줬다.

냉장고 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던 시간

그 시간에 철과 나무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그것들의 어울림

먼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같았을 것 같다.

해가 잘 들지 않는 스칸디나비아 어느 도시이거나,

[폭풍의 언덕] 모두가 죽거나 떠난 히드클리프의 집같기도 한, 느낌이다.

 

스텐레스 냄비는 산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잘 쓰지 않아 마치 어제 산 듯이 반짝거려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더랬다.

바구니를 씻다가 설거지 선반에 잘 씻겨져 놓인 냄비를 보니

수세미의 결이 선명한 만큼 반짝임이 사라진 닳고 있는 모습이었다.

매일 매일 사람들이 딛고, 수레가 지나며 바퀴자국을 남긴 황토길 단단함을 냄비에게서 슬쩍 보았다. 

 

오래도록 옆에 두고 보지 않았던 것과

오래도록 옆에 두었다 이제 만지기 시작한 것.

두가지 모두 오늘 아침 내게 인상적으로 보였지만, 둘은 분명 내게 다른 의미였다.

 

내 곁에 있는 누군가는 냉장고 위에 오랫동안 얹혀있었던 허브차같고,

누군가는 언제나 곁에 있었지만, 이제 겨우 만지작하기 시작한 스텐레스 냄비같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인 것 같고,

누군가의 곁에 있는 나는 대부분 어떤 쪽인가? 하는 질문을 해본다.

 

거듭 생각해봐도, 누군가라기보다 나야말로

냉장고 위에 오래도록 얹혀있어 유효기간이 지난 다음 버려진 허브차이기보다

한동안 세끼 밥을 먹지 않아 그 쓰임이 없다가, 세끼를 찾아먹게 되면서 다시 꺼내 길을 내고 있는 스텐레스냄비라는 생각을 하며, 

단 한 사람의 손길로 가스렌지 위에서 조리를 하고, 식탁 위에 올라 식사를 하고, 깨끗이 비운 뒤 수세미를 박박 문질러 설거지를 하여

처음 우리집에 올 때 수많은 냄비들과 똑같았던 광택은 사라지고, 단 하나의 결로 드리운 은은한 윤이 무늬가 되는 그런, 

누구라기보다 나야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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