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발이 등장한다.
발을 인정한다. 그래서 난 나의 모은 신체 중에 발을 가장 사랑한다.
그리고 '발'이라고 하면, 위 사진의 발이 언제나 상징처럼 생각난다.
내가 이 사진의 발을 좋아하는 이유는 점점 험해지는 발의 시간속에 내 발이 담고 있는 많은 시간과많은 이야기,
정리 되어갔던 많은 마음들이 사진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간과 이야기와 생각의 증거라고 할까?
그래서 뭔가 복잡하고 힘들 때면 이 발 사진을 본다. 마치 수도자의 말간 얼굴을 본 것처럼 괜히 결연해지며, 숙연해짐을 느낀다.
발은 한 번도 상위上位인 적이 없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실존을 말할 때, 실존의 근거는 발이다.
김경주 시인은 [밀어]의 발가락에서 번식이라는 말을 썼다.
발...
실존의 근거이면서 나를 번식, 확장해가는 몸의 가장 하위에 있는,
나의 출발지인 땅으로 내 데이터를 전달하는 가장 하위 통로
be here!
-잠시 딴 소리-
심지어 내 발은 왼쪽은 230. 오른쪽은 235. 정확히 한 사이즈가 차이가 난다.
주로 왼발에 신발을 맞춰 신는 편인데...
왼발에 신발을 맞추면 오른발은 항상 쪼그려 발가락에 굳은살이 없어질 날이 없다.
오른발에 맞추면 좋을 듯 하지만, 운동화나 부츠처럼 발등을 덮는 경우라면, 그렇게 한다.
하지만 발등을 덮지 못하는 구두의 경우 오른발에 맞추면 왼쪽 구두가 벗겨져 걷기가 너무 힘들어 오른발에게 그냥 고생하라고..냅둔다.
그래도 요즘은 운동화를 신는 것이 그리 결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발이 꽤 매끈해졌다.
하지만, 10년전만해도 운동화를 신고 회사에 출근하는 여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성인여자는 언제나 뾰족구두였다.
좋아졌다.
-잠시 딴 소리 끝-
얼마전 생일이었다.
여차저차 어느 때보다 조용하게 홀로 생일을 보냈는데, 왠지 나 자신에게 너무한 거 같아...
내내 생각하고 있었던 발 문신을 감행했다.
시작은 미미하게 출발하였다.
일이라는 다소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었던 나는 어느날 인도여행 중에 찍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는 그때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일상을 탈출한 듯, 그 기억속으로 돌아가 잠시 행복에 취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오래 뒤 어느날 지금의 무엇을 추억하며 미소지을 것을 만들어야겠다. 지금 난 뭘하고 있지? 생각했는데, 일 밖에는 없었고, 나는 가끔 그 일을 탈출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날아오를 것이라며...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 '새'로 상징되는 '자유' , 아마 난 오래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아이디가 '飛나이다' 나의 주제어는 날다. 새이다. 그럼 새를 몸에 새겨, 내가 지금 그토록 천착하고 있는 '자유'를 기념하자. 몸의 어디? 당연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발이다. 가장 하위에서 날아오르는 새, 가장 낮은 곳부터 날기시작하는 새, 호호 할머니가 된 어느날 내 발등에 새겨진 새를 보며... 그 나이에 난 자유를 생각했어. 틈만 나면 날아오르고 싶었어. 라고 생각하며 미소지을 것이다. 그때쯤 호호할머니인 내가 스스로에게 묻기를 희망한다. 지금은? 호호할머니인 나의 대답은 뭘까?
이렇게 된 것이다.
미리 봐 둔 타투숍으로 가서, 생일기념이니 잘 해달라고, 미리 봐둔 새를 내밀었다.
새의 몸에 색을 넣을 수도, 면을 메울 수도 있었지만 그냥 라인만 그려달라고 했다. 가볍게 날 수 있도록!
참을 수 있을만큼 아팠다.
몇몇 지인들에게 보여줬다.
미리 말해뒀는데도.. 설마했던지 하다하다 별걸 다 한단다. ㅋ
그래! 난 하다하다 별걸 다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왜 문신이 하고싶을까라는 생각을 시작했다.
오직 시간과 기억을 위해서 였을까? 아닌 것 같다.
내 몸에 뭔가를 새기고픈 욕구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저기 찾아봤다.
그러다..... 최근 [생각, 의식의 소음]이라는 책을 내신 몸연구소 김종갑 교수님의 블로그 글은
나는 왜 자꾸 문신을 하고팠던가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어 스스로를 납득하기에 좋았다.
(이 글의 마지막에는 자신을 텍스트화하는 쉬운 방법인 문신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몸 만들기에 대한 멋진 내용이 있다)
문신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에서 문신은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물감으로 그린 글씨나 그림, 무늬를 말한다. 글이나 그림을 종이가 아니라 피부에 쓰고 그리는 것이다. 이때 피부는 피부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백지가 된다. 뭔가로 채워넣지 않으면 휑하니 허전한 무(無)의 빈 공간이 되는 것이다. 눈에 띠는 아무 것도 없이 망망대해 펼쳐진 희디흰 모래사막은 공포감을 준다. 보고서 뭔가를 알아야 하는 데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허번 멜빌의 『백경』(白鯨)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이 거대한 흰 고래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유도 그러한 공포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무를 정복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문신하는 사람의 심리를 에이허브와 비교하는 것이 그리 어불성설은 아닐 것이다. 문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백지와 같은 몸의 표면에 각인된 기호이다. 읽을 수 없었던 몸이 읽히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문신은 몸에서 가장 백지와 닮은 부위인 팔이나 등에 새겨진다. 문신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팔은 그냥 팔이며 등은 그냥 등이다. 그러나 문신하는 사람에게 팔과 등은 허허벌판처럼 빈 공간으로 표상이 된다. 팔과 달리 손은 다섯 손가락과 손톱, 손마디, 손금으로 등으로 분절되고 의미화되어 있다. 얼굴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텍스트화된 손이나 얼굴에 비하면 팔과 등은 팔과 등이 아니라 몸의 여백(餘白)처럼 느껴진다. 문신하는 사람은 몸이 자기를 기호로 채워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http://blog.naver.com/starmoth/20191257323 중에서)
과거에 조폭들의 전유물이었던 문신이 최근에는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면서 과거에 호랑이와 용 일색이었던 문신의 형상도 사랑의 하트, 나뭇잎, 꽃, 문자 등으로 다양해졌다. 신분증처럼 조폭의 신분과 소속, 연대를 보여주던 집단적 문신이 옷이나 모자와 같은 취향으로 개인화된 것이다. 과거의 문신이 “우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문신은 ‘나’만을 표현한다.
문신이란 무엇인가? 사전적인 의미에서 문신은 살갗을 바늘로 찔러 먹물이나 물감으로 그린 글씨나 그림, 무늬를 말한다. 글이나 그림을 종이가 아니라 피부에 쓰고 그리는 것이다. 이때 피부는 피부가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백지가 된다. 뭔가로 채워넣지 않으면 휑하니 허전한 무(無)의 빈 공간이 되는 것이다. 눈에 띠는 아무 것도 없이 망망대해 펼쳐진 희디흰 모래사막은 공포감을 준다. 보고서 뭔가를 알아야 하는 데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허번 멜빌의 『백경』(白鯨)의 주인공 에이허브 선장이 거대한 흰 고래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이유도 그러한 공포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무를 정복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문신하는 사람의 심리를 에이허브와 비교하는 것이 그리 어불성설은 아닐 것이다. 문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백지와 같은 몸의 표면에 각인된 기호이다. 읽을 수 없었던 몸이 읽히는 텍스트가 된 것이다.
문신은 몸에서 가장 백지와 닮은 부위인 팔이나 등에 새겨진다. 문신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팔은 그냥 팔이며 등은 그냥 등이다. 그러나 문신하는 사람에게 팔과 등은 허허벌판처럼 빈 공간으로 표상이 된다. 팔과 달리 손은 다섯 손가락과 손톱, 손마디, 손금으로 등으로 분절되고 의미화되어 있다. 얼굴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텍스트화된 손이나 얼굴에 비하면 팔과 등은 팔과 등이 아니라 몸의 여백(餘白)처럼 느껴진다. 문신하는 사람은 몸이 자기를 기호로 채워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문신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 종이 텍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석기 시대로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가 있다.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몸이 종이 역할을 하였으며, 원시적인 문자로서 그림이나 무늬가 몸을 텍스트로 만들어주었다. 에른스트 캇시러의 말처럼 인간은 상징적인 동물이다. 물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의미의 세계를 추구하는 인간은 몸까지도 의미를 각인되는 텍스트로 만들어야 했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상징적 행위를 하였다. 돌도 그냥 돌이 아니라 성황당으로, 나무도 그냥 나무가 아니라 장승으로 상징화되지 않았던가.
문신은 상징화된 몸, 의미화된 텍스트이다. 모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문신도 읽히고 의미가 파악되어야 한다. 그러나 금방 이해되는 투명한 문신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상형문자처럼 불투명한 문신도 있다. 후자는 해석의 욕망을 자극한다. 예를 들어, 초승달 문신이 새겨진 누군가의 팔을 보면 그냥 무심코 지나치기가 어렵다. 그것의 의미를 짐작하느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건장한 청년이라면 초승달과의 부조화에 혼란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문신은 소통의 한 형태이다.
문자를 모르는 뉴질랜드의 마오이족은 지금도 몸에다가 문신을 각인한다. 과거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 가운데도 문신하는 부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현대의 개성화된 문신과 달리 그들은 자기 취향에 따라서 문신을 택할 수가 없었다. 부족에 고유한 문신을 새겨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족의 우두머리는 추장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추장 특유의 문신이나 머리장식을 하였다. 문신은 부족의 정체성과 신분을 말해주는 사회적 기호, 이른바 주민등록증이나 직함의 역할을 하였다.
문신과 마찬가지로 정치도 사회적 기호를 개인의 몸에 각인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규모가 작았던 원시 공동체를 비롯해서 개인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사회는 개인들 사이의 갈등이나 알력의 소지를 언제나 가지고 있다. 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홉즈나 루소나 말하는 자연 상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갈등과 불화는 피할 수 없다. 비관적이었던 홉즈는 자연 그대로 놔두면 양육강식의 투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평화로울 날이 없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루소와 홉즈에게 해결책은 사회계약이었다. 갈등이 발생할 경우에 당사자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삼의 권위적인 중재자가 개입함으로써 사태를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결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누구나 복종해야 하는 권위자의 존재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사회가 분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에는 힘이 센 자가 있는가 하면 약한 자가 있고, 꾀가 많은 자가 있는가 하면 순박한 자, 키가 큰 자가 있는가 하면 키가 작은 자도 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해서 사회는 다양하게 분절될 수가 있다. 몸의 다양성이 다양한 분절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계약은 지배와 복종의 구도를 계약의 축으로 바꿔놓는다. 한편에 통치자와 다른 한편에 피통치자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누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정치의 핵심에 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처럼 사람들이 다 비슷하고 개인차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또 관점에 따라서 통치자의 자격도 수없이 달라질 수가 있다. 눈에 보이는 미세한 차이를 가지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양극단의 차이로 분절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분절의 어려움은 소리나 색상의 분절과 비교될 수 있다. 색은 가장 엷은 무색에서 가장 짙은 검은색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있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몇 개로 분절할 것인가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이것은 살을 몇 개의 몸으로 구획할 것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궤도에 있다. 만약 두 개로 분절한다면 세상에는 단 두 종류의 색상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양 극단의 사이에 있는 무수히 다양한 색들은 “폭력적으로” 그것의 고유한 성질이 부정되면서 흰색이나 검은색의 어느 한 범주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사소한 차이가 무시되는 순간에 차이는 절대적인 차이로 전환이 된다. 과거에 엇비슷하고 사소했던 갑과 을의 차이가 통치자와 피통치자라는 차이로 절대화되는 것이다. 이때 정치에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사소한 차이를 절대적인 차이로 정당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몸의 정치는 사소한 차이를 절대적 차이로 변환시키는 사회적 기제이다. 이것인지 저것인지 헷갈리는 차이를 하늘과 땅처럼 분명한 차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그러한 절대적 차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낯선 방문객은 부족원을 추장으로, 시동을 왕으로 착각할 수가 있다. 육안으로 보기에 전자가 후자보다 키도 크고 풍채가 당당하며 위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각과 혼란의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고 차이의 위계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 등장한 제도가 몸의 정치이다. 아직 의미가 각인되지 않은 살을 의미가 분명한 상징적 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 문신이나 의복은 그러한 위계적 상징화의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화려한 머리장식과 위엄있는 문신을 하고 있으면 추장의 왜소한 체구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불어서 이제 부족원들이 서로를 식별하기 위해서 바라보는 것은 체구나 얼굴 생김새가 아니라 머리장식과 문신이 된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안 보이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추장의 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위와 권위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왕과 신민의 관계를 몸에 각인함으로써 그러한 제도적 차이를 자연적인 차이로 보이게 하는 것이 이른바 몸 정치이다. 이러한 몸의 정치는 유기체적인 몸을 상징적으로—폭력적으로--분절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와 아래, 앞과 뒤, 머리, 몸통, 사지 등의 분절도 그러한 정치적 행위이다. 『국가론』에서 플라톤은 국가를 한 개인의 몸에게 비유하고는, 몸을 세 부분으로 구획지었다. 머리와 가슴, 사지의 위계가 그것으로, 머리(지혜)는 지배하는 통치자, 가슴(용기)은 국가를 지키는 병사, 마지막으로 사지(육체적 힘)는 먹을 것을 생산하는 노동자와 대응한다. 플라톤이 이와 같이 인간의 몸을 세 부분으로 분절한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회적 계층을 몸의 기관으로 설명함으로써 인위적인 제도를 자연적인 것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물론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철학자도 가슴과 사지를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정체성은 머리에 있다. 따라서 철학자를 볼 때에도 우리는 가슴이나 사지가 아니라 머리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머리가 신체의 가장 상단에 있듯이 철학자도 국가의 가장 높은 권좌에서 일반 대중을 통치해야 한다. 만일 군인이나 노동자가 통치하려 한다면, 그것은 다리가 머리 위에 달린 괴물을 만들어놓는다. 여기에서 몸은 삼분될 뿐 아니라 상하 가치의 위계를 수반한다. 시민들도 뛰어난 몸을 가진 자와 열등한 몸을 가진 자로 서열화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플라톤의 몸정치를 문학적인 알레고리나 신화로 웃어넘길 수가 있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던 그리스의 용맹한 장군들처럼 이러한 위계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킬레스라면 머리보다 가슴을 훨씬 높이 평가하였을 것이며, 『신곡』의 시인 단테라면 양자의 평가를 수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숍은 「배와 사지」에서 몸을 배와 사지로 이분하였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어떤 식으로든지 인간의 자연적인 몸이 사회적으로 분절되고 상징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백지와 같은 몸에 사회적 계층과 지위, 역할이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육체를 무시하고 영혼을 중시하는 전통도 몸의 정치적 상징화의 또 다른 예이다. 피타고라스학파와 오르페우스교의 신앙을 물려받은 플라톤은 영혼이 생노병사하는 육체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생각하였다. 영혼이 불변하는 진리라면 육체는 변덕스럽고 게걸스러운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영원성의 메스를 가지고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전통은 르네상스 시대에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는 몸정치 이론으로 재탄생하였다. 15세기의 법학자 존 포테스큐(Sir John Fortescue)경은 국왕의 권력은 천사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죽어야 하는 언약한 육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신성한 몸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통치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신의 섭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 자체도 죽어야 하는 신민들의 몸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중에 엘리자베스여왕도 취임사에서 자신이“물질적으로는 언약한 몸이지만, 신의 은총에 의해 통치하는 몸정치body politic”가 되었다고 권력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몸정치 사상은 단순히 정치사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절하는 몸정치는 개인의 몸을 그와 같이 분절된 형태로 재구성해야 한다. 상징화되고 의미화된 몸은 추상적인 상징과 의미로 남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한 실재가 되는 것이다. 왕은 그냥 왕이 아니라 왕처럼 보여야 한다. 그냥 하인인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인처럼 보여야 한다. 신하도 그냥 하인이 아니라 하인처럼 보여야 한다. 다시 『국가론』으로 돌아가서, 플라톤은 미래의 통치자 학생은 자기의 몸을 통치자답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인이나 노예들과 어울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가 ‘사지’와 가까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사지의 비천한 말투와 동작이 몸에 배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남학생이 여자와 가까이 지내면 몸도 여자를 닮아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몸정치 사상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저러한 몸으로 완성된 형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의미화되지 않은 살에 지나지 않는다. 살은 신분에 맞은 몸으로 변형되고 재탄생되어야 한다. 몸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양반으로 태어난 양반이 자신이 양반이라고 알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양반은 몸으로 체화되어야 한다. 양반처럼 걷고 양반처럼 말하며 양반처럼 마시고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가 양반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몸정치에 맞게 만들어진 몸은 언제나 위와 아래, 느림과 빠름, 보고 보여지는 등의 이원적 위계와 문법에 따라서 움직인다. 멈춰있거나 움직이고, 빨리 움직이거나 느리게 움직이며, 보거나 보이는 몸의 차이는 몸정치에 의해서 규정이 되는 것이다. 양반이 하인의 앞에서 느리게 팔자걸음으로 걷는다면, 하인은 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걸어간다. 집에 불이 나도 허둥대지 않도록 훈육된 양반의 몸과 달리 하인은 종종걸음으로 걷는 몸으로 훈육되었기 때문에 자동인형처럼 급한 일이 없어도 종종걸음으로 걷는다. 또 양반은 키가 작아도 크게 보이도록 자세가 의젓하게 교정된 몸을 가지고 있다면 하인은 키가 작게 보이도록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굽신거리는 몸동작이 몸에 배어있다. 이 점에서 양자의 몸은 양반과 하인의 정보가 프로그램된 로봇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지위와 신분에 알맞게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의 차이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지위가 높은 자의 몸은 저절로 가서 윗자리를 차지한다. 윗자리와 말단자리의 구획이 확실한 공간에서는 개인의 체구나 위엄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상석은 키높이 구두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60cm의 키를 170으로 변형시키는 사회적 기제가 상석이지 않은가. 교단이나 강단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단상은 상징적 키라고 할 수 있다. 몸정치의 각본에 따라서 만들어진 몸이란 그러한 차이의 질서에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을 말한다. 신분사회에서 그와 같은 몸의 위계와 문법을 위반하는 몸—저항적, 반동적--은 채찍이나 체형, 고문 등으로 교정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교정이 불가능한 몸은 사지절단이나 혀뽑기, 능지처참, 참수 등으로 일부나 전체가 제거되어야 했다.
몸정치는 몸의 크기와 속도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양태까지도 규정한다. 지위와 역할에 따라서 능동성과 수동성이 다르게 배치되는 것이다. 높은 옥좌에 앉아있는 왕은 위에서 아래로 신하들을 내려다본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힘은 왕으로부터 발원해서 신하에게도 전달이 된다. 한편에 영향을 주는 능동적인 몸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영향을 받는 수동적인 몸이 있는 것이다. 왕이 말하면 신하는 들어야 하고, 왕이 신하를 보는 반면에 신하는 보여져야 한다. 궁궐 밖으로 왕이 거둥할 때 평민들은 길가에 넙죽 엎드려 자세를 낮춰야 했으며, 경을 치고 주리를 틀릴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감히 고개를 들고 왕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태양처럼 왕의 시선은 일방적이다. 보고 보여지기만 하는 일방적 몸의 역학에서 평민은 태양-왕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야훼를 본 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일방성으로 인해서 왕의 몸은 르네상스의 죽지 않는 몸처럼 신격화되고 신비화되기 시작한다. 스스로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고 아는 존재가 신이지 않은가.
2004년에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마지막 사무라이>(The Last Samurai)에는 신분사회적인 몸정치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었으나 사무라이가 된 네이선 알그렌은 황제를 알현할 명예를 얻게 되는데, 그가 궁궐의 문을 열고 들어가 황제와 만나기까지의 단계적 과정은 신비화의 전형이다. 그는 수많은 문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황제와 대면하기까지 수많은 문들이 열리고 닫혀야 하는 것이다. 마침내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황제의 용안을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된다. 아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그와 황제 사이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알그렌은 그와 같이 신비한 황제의 권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누가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의 얼굴이 그냥 얼굴이며 그냥 몸이라면 황제는 용안과 옥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앞서 소개했던 몸정치, 즉 신분과 역할에 따른 몸 되기와 몸 만들기가 계급사회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몸과 몸이 만나서 교류하는 사회적 장에서 그러한 만남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문법이 일상의 몸정치이다. 있다.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개인은 개별적인 낱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합의 규칙인 통사론이 없으면 의미있는 소통에 임할 수가 없다. 몸과 몸은 그냥 접촉하고 충돌하거나 반발하고, 분리되고 재결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능동과 수동, 위와 아래 등의 제도화된 방법이 뒷받침을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갑과 을이 그냥 만나서 악수를 하고 바로 소통과 관계에 접어들지는 않는다. 양자의 첫 만남과 소통 사이에는 알그렌이 황제를 접견하기까지 거쳐야 했던 문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통과의례들이 있다. 이러한 의례가 양자의 결합을 지배하는 문법이 된다. 누가 먼저 손을 내미는가? 악수하면서 몇차례나 손을 흔들 것인가? 얼마나 세게 상대의 손을 잡을 것인가? 누가 먼저 입을 열을 것인가? 찻집에 갈 것인가? 길가에서 이야기를 할 것인가? 누가 먼저 차를 주문할 것인가? 시선을 상대의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얼마나 오랜 동안 상대와 시선을 마주할 것인가? 두 사람의 만남은 이와 같이 수많은 고려사항들의 절차를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E.T와 같이 지구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라면 젓가락질을 배우듯이 매뉴얼을 보고서 하나하나 몸동작을 연구하고 연습하지 않으면 그러한 상황에 적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 지금까지 그러한 절차와 방법으로 빗어진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상황에 적절한 행동을 하게 된다.
계급의 차이가 없이 평등한 민주주의 사회도 성별과 나이, 신분에 따라서 몸을 분절하고, 거기에 걸맞는 몸만들기를 강요한다. 왕과 신하의 관계처럼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연장자와 연소자 사이에도 높고 낮음, 큼과 작음, 선과 후, 능동성과 수동성 등의 기제가 작동한다.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하고, 답례하는 연장자보다 고개를 더 많이 숙여야 한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이야기를 하겠지만 남자와 여자의 몸정치는 사소할 수도 있는 성적 차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더 크고 더 힘이 세게 보이도록 몸을 훈육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몸 만들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몸의 분절이다. 부의 차이에 따라서 부유한 몸과 가난한 몸으로 몸이 차별화되는 것이다. 과거에 양반이 양반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듯이 부유한 상류층도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장미에서 장미향이 나듯이 부유와 여유가 몸으로 체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직 그와 같이 부가 몸으로 체화되지 않은 사람은 벼락부자나 출세한 촌놈으로, 상류층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 아무리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숨기려고 해도 그에게서 문득 문득 가난의 흔적이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양식 식사가 일반화되었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포크와 나이프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서양식이 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자리에서는 남의 옷을 입은 사람처럼 웬지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게 행동하게 된다. 너무나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 그의 몸이 서양식 예법의 몸으로 재탄생하지 않은 것이다.
계급의 차이가 그러하였듯이 부자와 빈자의 차이도 몸의 차이로 구체화된다. 그러한 몸의 차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장기적인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돈보다도 더욱 중요한 상징적·사회적 가치의 권위와 위엄을 갖추게 된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돈으로 양반의 신분을 얻었지만 양반 되기를 포기했던 부자 상인을 생각해보라. 어린 시절부터 양반의 규범에 따라서 양반의 몸으로 재탄생하지 않으면 양반처럼 행동하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주식으로 횡재하면 하루 아침에 부자의 반열에 오를 수가 있다. 그러나 상류층의 몸으로 거듭나는 것은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불가능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상류층의 몸 만들기는 외국어 습득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부와 부유한 몸의 차이는 언어의 의미와 발음의 차이와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불어를 처음 배우는 어른은 열심히 노력을 하면 불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인처럼 불어를 유창하게 발음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문득문득 한국식 억양이 새어나오기 때문이다. 난징 대학살 때에 일본인 자경단원들이 한국인을 솎아내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十五圓五十錢”을 일본어로 발음하도록 시켰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고 가장 재기발랄한 지식인의 한 명인 슬라브예 지젝은 매년 두세권의 책을 영어로 출간하고 있다. 그는 영미권의 어느 학자보다도 뛰어나게 영어로 글을 쓴다. 그러나 1분만 그의 발성을 들어보면 그가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만큼 언어의 습득과 체득(體得)의 차이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몸으로의 체화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을 몸으로 분절하고 의미화함으로써 사회적 정체성을 다지게 된다. 우리는 피부의 표면에 문신을 각인함으로써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쉽사리 만들 수 있는 문신과 달리 몸 만들기는 오랜 기간과 훈련, 자기단련과 극기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으로써 보이는 특수한 몸이, 읽히고 이해되는 일반적 텍스트로 변형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텍스트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성공한 사업가가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몸에서 권위와 풍요를 읽을 수가 있다. 자기가 성공했다고 홍보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대접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계층적인 아비투스이다. 과거에는 신분에 따른 의복의 차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양반의 의복만 걸치고 있으면 양반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분에 따른 의복이 존재하지 않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의복이 아니라 몸 자체가 자신의 신분으로 체화되어 있어야 한다.
암튼 그랬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를 들어갔다가 나오는 배.
나의 몽이를 싣고 배를 탔기에 돌아오는 배 안에, 차 안에 내가 있었다.
멀거니, 차창밖을 보는데 하늘을 하는 갈매기들이 이뻐, 핸펀 카메라로 촛점을 맞추었다.
새가 해를 향해 난다!
난 이제 발하면, 새가 날고 있는 발이 생각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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