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시 반,
엄마가 깨웠다.
밥 먹으라고, 아버지 출근하시는 시간이었다.
승아, 밥 먹자.. 승아, 조금만 먹자.
일어나지 않았다.
의사가 왔고, 준비하라고 했다.
그것이었다.
오빠의 얼굴을 만졌다. 따뜻했다.
입안에서 그르렁거리는 가래를 빼주려고 입을 벌렸다.
어릴때부터 항생제를 많이 먹어 검은 이가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항상 이를 물었었다.
엄마가 동생을 찾는다.
서울 자취방에는 전화도 핸드폰도 없었다.
학교 조교실에 전화를 하니, 이른 시간이라 받지 않는다.
아홉시까지 기다렸다.
그 사이 교열이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빨리 오라고...
아홉시가 되어 조교실에 전화를 해서 동생을 찾아달라고 했다.
곧 도서관에 있던 동생과 통화를 했다. 빨리 오라고,
기차는 11시에 있었다.
성당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노래하고....
나는 오빠와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오빠는 숨만 쉬고 있었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친척들이 하나 둘 모였다.
모두 울었다.
우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오빠는 정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불렀다.
세시에 동생이 왔다.
동생이 형!하고 불렀다.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그리고 일으키라고 손으로 표시했다.
동생에게 안긴 오빠는 동생과 눈을 마주쳤다.
동생이 알았다고, 걱정말라고 했다. 괜찮다고 했다. 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동생이 울었고, 오빠는 그런 동생을 봤다. 눈이 아주 깊었다. 너무 많이 깊었다.
나는 내가 불러도 일어나지 않던 오빠가 동생이 부르자 일어났다는 것이 그 순간 야속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틈에 아는척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동생이 눕히자 오빠는 ... 어떤 표시도 없이 그냥 세상을 떠났다.
의사가 그렇게 말을 했다.
사람들이 통곡을 했다.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내가 어떻게 울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이 우는 소리는 기억이 난다.
할일이 많았다.
자식이 없이 죽은 사람은 하루만에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바로 내일이란다.
나는 집으로 가 오빠의 사진을 찾았다.
3*4센티 명함판 사진이 있었다. 빨간색 폴로티를 입은 사진이었다.
사진관에 가서 크게 확대해달라고 했다. 어쩌고 저쩌고 말이 많았다.
장례식에 쓸거라고, 그렇게 말하고서야 말을 멈추고 알았다고 했다.
사람들이 모였다.
오빠 친구들이 많이 왔다. 그들은 아직 어리다. 어린 친구들이 어린 친구를 보내러 왔다. 경험이 없어서인지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교열이 오빠가 왔다. 안아줬다.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날,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나를 위로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여전히 빨간 티에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검은 색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답했다.
검은 색 옷을 가지러 서울에 갈 수도, 옷을 사러 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검은 색 옷이 싫었다.
사람들이 염을 한다고 했다.
오빠는 얌전히 잘 누워있었다.
얼굴색도 그래도이다. 원래 오빠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무지하게 잘 생겼었는데, 이 얼굴로 딴 세상에 가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죽을 때의 얼굴은 잘 생긴, 못 생긴 그런 얼굴이 아니라 이상한 얼굴이었다.
나는 오빠의 얼굴을 만졌다.
차갑고, 마치 고무처럼 이상한 탄력을 가졌다.
그래서 실감이 났다.
지금도 손끝에서 그 느낌은 남아있다. 죽은 오빠의 얼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시간을 주지 않는다. 모두 제 멋대로였다.
아무도 나를, 아니면 우리 가족을 배려하지 않았다. 마치 정해놓은 무엇을 따라하지 않으면 절대 안될 무엇이 있는 것처럼 자기들 멋대로였다.
비키라고 하고, 저리 가 있으라고 하고, 또 뭘하라고 하고,
나는 왜 그 사람들이 모두 마음대로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오빠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그리고 지난 20년동안 정말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던 사람인데, 왜 그 때는 그들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을까.
나는 내내 후회되었다.
큰소리로 그들을 내 보지 않은 것을....
그래서 오빠가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주지 못한 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나는 내가 바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찾아 빈소에 걸었다.
사람들이 참 잘 생겼다고 입을 댄다.
다음날 새벽에 화장하고, 어디에다 뿌린다고 한다.
그것 또한 나는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
다만, 친척들과 아버지의 친구들이 나를 불러 말했다.
이제 니가 이 집의 맏이다. 엄마 아버지를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
그렇게 말햇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졸음이 오는 것이 너무 싫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잠이 들기 시작했다.
한켠에서 오빠친구들이 술을 먹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듯 괜히 큰소리로 웃기도 한다.
아버지는 오빠 친구들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승이는 딱 지가 살만큼 산거다. 그 아이가 그런 아이가 앞으로 30대, 40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일 거다. 딱 지 살만큼 산거다.
나는 그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오빠는 아주 예민하고, 많이 순수하고, 좀 괴팍하고, 좀 여리고, 많이 다정하고, 옆에 있으면 많이 만져주고, 머리도 많이 쓰다듬어주고, 가끔 발을 걸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내고, 열등감도 많고, 깔끔한 폴로티를 좋아하고, 청바지만 입고, 내가 야상 염색해주면 최고로 좋아하고, 내내 그걸 입고 다니고, 책상에다 아크릴로 'DREAM' 이라고 색색깔로 써놓고, 화장실에서는 꼭 노래를 하면서 응가를 하고, 파자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다니고, 장학퀴즈를 할때는 티비 가장 앞에 앉아 무지 잘 맞추고, 밥 먹을 때 꼭 신문을 보면서 먹고, 그래서 혼 나고. 밤만 되면 내 방으로 와서 야식 먹자고 꼬셔서 부려먹고, 돼지 된다고 먹지도 못하고 하고, 다 커서도 거리를 다닐 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깨동무를 자꾸 하고, 동생과 내 돈을 떼어먹고, 제일 좋은 것만 지가 하고...,
한번은 병원에서 통원치료때문에 잠시 머물고 있던 이모집에서 심심하다며 자취를 하고 있던 동생과 내가 살던 집으로 찾아오겠다고 했다. 걱정이 되었지만, 하도 오겟다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기다렸다. 기다려도 , 기다려도 오지 않아 동생과 나는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몸으로 오는 동안 성신여대 앞쪽에 구경거리가 많아서 그걸 구경하느라 늦었다고 했다. 동생과 나는 오빠에게 무지하게 화를 냈다. 어쩌면 화가 나는 것을 무지 하게 참았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좁은 방에서 동생, 오빠, 나 이렇게 나란히 누웠다. 오빠는 잠이 들었고, 동생과 나는 번갈아 한 숨을 쉬었다. 우리에게 다가올 어떤 커다란 운명, 그것은 예견된 오빠의 부재였다. 죽을 날을 받아놓은 형제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꽤 오랫동안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날이었다.
오늘이 20년전 한 존재가 존재에서 부재로 넘어간 날.
존재와 부재...
그렇지만,
그것은 반대일지도 모른다.
함께 했던 20년은 부재, 함께 하지 못한 20년은 존재.
그것이 맞는 것 같다.
살아있었을 때는 사랑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빠가 죽고 나서 참 많이 사랑하고, 보고싶어하고, 그리워한다.
그 따뜻한 손으로 어깨동무를 하고,
이렇게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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