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이 영화는 '체게바라'의 여행이야기이다. 그는 혁명가이며, 20세기 젊은이들의 우상이었으며, 마지막 리얼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이 영화를 우연한 기회에 어떤 정보도 없이, 심지어 포스터조차 보지 못한 상태로 엉겁결에 보았다. 하지만 상영관을 나오면서, 만나서 반가웠다라고 뒤돌아 인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쩌면 이 영화가 내게 하나의 유기체처럼 깊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정말 그랬다.
이 영화는 대학 졸업을 앞 둔 체게바라가, 당시에는 ‘에르네스토’였으며, 모두들 그를 ‘푸세’라고 불렀다. 그는 졸업이벤트를 하듯 친구인 그라나도와 고물 오토바이 '포데로사'를 타고 자신들이 살고 있던 대륙인 남미여행을 시작한다. 거대한 남미대륙의 대자연은 멋있었지만, 그곳을 배경으로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불합리한 사회구조로부터 추방당했다. 자신들의 땅을 제국주의에 빼앗기고 잉카문명의 위대함에서 쫓겨나 마른 흙만 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천국 같은 곳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푸세와 그라나도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그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없는 길에서 길을 찾은 듯했다.
"본 적이 없는 세상을 그리워 할 수 있나요?"
푸세는 마추픽추 유적지의 돌담을 손끝으로 쓰다듬으면서 한 말이다. 그는 어떤 문명을 위해 또 어떤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을 시작으로 자신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합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저 여행 중이었던 한 청년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이 영화를 본지 4년 만에 마추픽추가 있는 남미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그의 말처럼 본 적 없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강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쿠스코의 원주민 소년이 푸세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12각돌’을 만져보고, 푸세처럼 카페에서 마테차를 대접받았으며, 또 푸세가 그랬던 것처럼 그곳 사람들과 나란히 길가에 앉아 쌉쌀하고도 구수한 코카잎을 씹었다. 그리고 푸세처럼 마추픽추에 올라가 돌담에 기대어 일기를 썼다. 산 아래에 도도히 감싸 흐르는 붉은 강도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 한 사람의 얼굴에서 수십명, 수백명의 얼굴이 섞여서 보이는 바로 그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남미의 새로운 인종을 ‘메스티조’라고 한다. 푸세는 영화 말미에 “우리는 모두 ‘메스티조’라는 하나의 민족이며, 메스티조는 편협한 지역주의에서 탈피해서 하나된 아메리카를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과거와 같은 나는 여기에 없다.” 라고 스스로 여행을 평가했다.
며칠 뒤면 특별했던 남미여행을 다녀온 지 5년이 된다. 그때 그 여행이 다른 여행과는 좀 달랐던 것은, 아마도 여행 내내 체게바라를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조금 깊고 그윽한 시선으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을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 후에 읽은 <체게바라 평전>에서 이 관점이야 말로 강한 의지나 가치관을 만들 수 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힘이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거대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저 한 편의 영화이며, 한 감독의 작품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도 중심을 잃는다던가, 가고 있는 방향이 헷갈릴 때면 이 영화를 본다. 그리고 푸세, 체게바라의 혁명본질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 높이 평가받듯, 이 영화의 본질 또한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나도 이것으로 중심을 삼고자 꽤 애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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