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란 이탈리아어 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여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삶을 찬양하는 것은 식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삶을 이야기 하지 않고 죽음만 이야기하기엔 죽음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
그것이 문제다.
여자가 알고 싶은 것은 죽음 자체이다.
죽음 이후의 삶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에 따라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순간에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하고 말하는 순간,
여자는 커다란 무엇인가가 다가옴을 느꼈다.
죽음이란,
죽음을 곁에 둔 자들이 선택한다.
삶 옆에 죽음의 자리를 항상 같이 두고 사는 사람.
삶의 모습이 더할나위 활기차다고 하더라도 그 곁에 죽음을 둔 자라면,
작은 사건의 순간에도 삶과 죽음을 나란히 놓고 선택을 한다.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곁에서 멀리 떨어뜨리고,
생의 끝에 도달 지점에,
내 곁으로 끌어당기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말로, 글로 어떻게 그것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여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화분에 심어 싹을 틔운 고구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저 고구마는 썩어서 거름이 되고, 고구마가 될거야.
죽음이란 그런 것이야.
강아지가 죽었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면 강아지는 따뜻한 나라에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아니면 좋은 주인에게 다시 태어날거야.
죽음이란 그런 것이야.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신거야. 거기는 아프지 않는 곳이야. 할아버지의 뼛가루를 묻은 잣나무는 내년이면
어느해보다 실한 잣이 열릴거야.
죽음이란 그런 것이야.
이것이 죽음의 실체일까?
아님 죽음의 왜곡일까?
여자는 죽음연구소에서 발간한 책 표지를 보면서 생각한다.
어떻게 한 권의 책으로 죽음에 관한 교육을 할 수 있는거지?
오늘은 축구 선수가 자살을 했다는 보도를 들었고, 토요일에는 SG워너비의 채동하가 자살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금요일에는 자살한 최진실, 최진영의 엄마가 '사랑'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들은 살아서 이 세상을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악독한 세상에,,,
죽음 교육이 아니라, 이성이나 감정도 없는 철갑인간이 되는 훈련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공포라는 것은 느끼지도 못하는 철갑인간이 되는 훈련이 자살예방훈련이 되지 않을까?
이 독한 세상에...서... 목숨을 유지하려면,
정말 이 독한 세상... 에...서... 생을 유지하려면,
삶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것이, 죽음의 존엄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 것인가, 여자는 의심한다.
이 독한 세상에서 살아있으라고 하는 것이 맞냐고...
죽음 전까지 형체도 느껴지지 못할 만큼 마른 몸으로 침대 이불 속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는 최진실이,
지금까지 그렇게 생을 유지하고 있다면,
혹 그 지옥같은 시간을 지나 좀 다르게 살아내었다고 하더라도,
이 독한 세상이 그 여자를 가만히 두었을까?
세상에게 그럴 자신이 있냐고 묻고 싶다.
대체 알 수 없다.
무엇을 배워서, 삶을 지킨단 말인지.
여자는 죽음교육을 받으러 간다.
죽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는 죽음연구소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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