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경주가 시베리아 중심의 여행을 하면서 쓴 여행기 패스포트에 나오는 글이다.
그가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재미있다.
여: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도 되나요?
남: 물론이죠. 저는 타이피스트예요.
여: 주로 무엇을 치시죠?
남: 음…… 수평선, 어제 본 소녀의 발목, 딸기 시럽, 저녁에 불 꺼진 임대 아파트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리코더 소리, 부풀고 있는 빵 냄새, 제가 치는 건 아주 다양해요.
여: 아주 재밌는 일을 하시네요.
참 재미있는 일이다.
어제와 그제는 나도 타이피스트, 그 재미있는 일을 내내 했다.
그 일을 밤새.., 아니 밤새는 것처럼,
내내 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는 새벽이 되어 '개인의 취향'과 '검사프린세스' 의 마지막회를 보았다.
나는 이 두 편 드라마의 결말을 보면서
밤새 ... 아니 밤새는 것처럼 보냈던 시간이 행복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하며
아침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자
내가 내내 타이핑을 했던 것을 다시 보았다.
낯설기만 하구나.
분명 행복한 결말이었으며,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내 것이 낯설고,
그것들이 내게 내 것이라고 꼭꼭 쟁여있었다.
묵살.
묵살.
묵살.
나는 덮어버리기를 좋아한다.
온갖 너저분한 것들을 널널이 깔아놓고는, 그 위를 손에 잡히는 대로 함부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말간 얼굴로 모른 척 딴 데를 본다.
그래서 재미있다.
빵 굽는 타자기
김경주
고양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수는 없어요 고양이는
모두가 쓰다듬어주면 멀미를 하는 동물이니까요
돌림병을 앓고 있는 타자기를 고치러 거리를 나섰죠
이제 이 도시엔 타자기를 치료하는 곳은 별로 없어요
내 타자기는 자꾸 이상한 트림을 해요
비명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물에 뜨는 빵을 사 왔어요
비명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가라앉은 빵을 타고 물 속으로 내려갔어요
비명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매일 밤 걸레로 욕조를 닦아요
이야기는 떠나고 욕조만 남은 문장을 쓰기 위해
비명
4월엔 덧니가 자랐고
5월엔 앞니가 부러졌어요
6월엔 송곳니에 설탕을 발라주었죠
고양이가 죽었어요 죽은 고양이를 타자기에 넣어 주었어요
들들들 종이 위에서 멀미하는 고양이들
내 고양이는 담과 담 사이에서만 흘레붙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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