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히는대로 詩

[조연호] 천문 外

by 발비(發飛) 2009. 6. 16.

내가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다른 나를 생각한다.

 

 

 

우주에 떠서 꼼짝 않고 떠 있는,

융기와 침강으로 균열된 지층을 가진,

네모난 입방체

 

 

 

1. 입방체 안으로 들어가다

 

 

모든 것은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한 줄의 여운은 그의 대답을 위한 공간이다.

 

 

 

왼발을 저는 미나, 미나는 지금 페리호를 타고 3시간 남짓 떠나는 물 위의 어떤 여행. 미나의 허무한 이름들은 늦여름까지 계속 산등성이를 뒤덮는다. 백사장 끝에 서서 미나가 구토한다. 깨진 창문은 아름다웠는데, 방 안에 꾹꾹 찍힌 구두 발자국들은 아름다웠는데, 방문을 열면 죽은 미나가 흉한 냄새로 사람을 반기곤 했다. 아무도 네 어린 딸이 울고 있다고 미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 「왼발을 저는 미나」전문 조연호 제1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왼발을 저는 미나는 물 위를 여행하고 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미나가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어디에도 목적지에 대한 힌트는 없다. 하지만 미나는 과거의 삶으로부터 떠나고 있음은 알 수 있다. 미나의 과거는 ‘깨진 창문은 아름다웠는데, 방 안에 꾹꾹 찍힌 구두 발자국들은 아름다웠는데, 방문을 열면 죽은 미나가 흉한 냄새로 사람을 반기곤 했다.’였다. 불구이며, 불통이며, 고립이었다. 왼발을 저는 미나가 어떻게 그 방을 나와 물위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는지도 역시 모른다. 하지만 미나는 자신이 스스로 불렀을 이름과 타인이 불렀을 ‘미나’라는 이름이 산등성에 피는 들꽃이 되어 덮었고, 백사장 끝에서 시간과 시간 사이의 것들을 토해낸다. ‘아무도 네 어린 딸이 울고 있다고 미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 시인은 미나를 통해서 시인 안에서 울고 있는 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있다.

 

그의 제1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은 과거이다.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렇듯 제 1시집은 과거와의 결별을 위한 수순이다. 조연호 시인 또한 그로서는 지독했을 과거와의 작별을 위해 수많은 시를 썼을 것이다. 미나는 시인 자신이며 시인 안에서 울고 있는 시인을 닮은 딸, 곧 시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마지막장에 「왼발을 저는 미나」를 수록했다.

 

 

 

그날은 군대 가서 죽은 사촌형이 내 뺨을 쳤고 물 빠진 셔츠 얼룩을 닮은 구름이 빨래줄 위를 평화롭게 걸어갔다. 마지막 인과라 생각하며 문 열어두었던 붉은 봄날,

-조연호 「죽음에 이르는 계절」중에서『죽음에 이르는 계절』2004

 

 

영영 소년이 될 수 없는 아이와 상자 속의 거짓들은 용서 받아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조연호 「달의 목련」중에서『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 시학 2004

 

누군가 강 저편으로 외롭게 돌 던졌고, 항상 돌은 더 아프고 더 외로운 쪽으로만 날아갔다. 어떤 이가 몸 속 깊은 웅덩이를 파고 목마름을 담는다

- 조연호 「불을 꿈꾸며」중에서『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 시학 2004

 

 

국수를 삶으며 생각하는 쥐의 날, 단단히 묶은 폐휴지 사이에 얇게 접혀 있던 쥐의 날, 쥐약을 쳐야지, 라고 마음먹는 쥐의 날, 약병 속에 단단하게 뭉쳐 있다가 누군가의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들어가 위벽을 헐어내고 싶었던, 엄마의 등 때를 밀어주고 싶었던 쥐의 날,

-조연호 「쥐의 날」중에서『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 시학 2004

 

 

6월 장미의 날에 장미 송이를 들고 애인은 다른 남자를 찾아갔다. 내 손이 벙어리 장갑을 끼고 3년 전의 지하도 입구로부터 5년후의 지하도 입구까지 걸어갔다. 89년 8월 29일에 내 절망이 조경가위에 잘려 나갔다.

-조연호 「연혁」중에서『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 시학 2004

 

 

 

첫 시집을 ‘과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등단시는 어땠을까?

 

 

 

나는 순을 밀어 올리며 껍질 밖으로 나왔다. 땅 위에 하늘의 끝자리를 조금씩 올려놓으면 안개가 내려올 때 다발 꽃을 손에 쥔 아이가 허전한 꿈 가를 뛰놀고 있었다. 아무도 그 곳에 와서 기웃거리지 않았으므로 그 아이의 걸음, 한 줌의 사랑에도 묶이지 않았다. 안개는 강과 함께 흘러가고 들풀의 잠결로 깔깔한 삶이 두런거렸다. 그리움을 뒷전에 두고 나는 망울을 터뜨리며 봉오리 밖으로 나왔다. 몇 장의 꽃잎이 내 빈 손에 넓은 잎의 속죄를 쥐어주고 있었다.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열매를 꿈꾸며」전문

 

 

 

시인은 등단시를 읽은 첫 느낌은 두리번거림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고자 하였지만 어떤 끈에도, 구역에도, 틀에도 묶이지 않았다. 나오려고 했던 것이 그의 모두이다. '몇 장의 꽃잎이 내 빈 손에 넓은 잎의 속죄를 쥐어주고 있었다.'라는 말은 애초에 트릭이다. 두리번거림을 들키지 않기 위한 시인의 기술이다. 하지만 등단시 이후의 「왼발을 저는 미나」에서는 물 위로의 여행을 떠났으므로 한 걸음을 옮겨 놓은 것이다. 미나가 어떻게 여행을 시작하였는지에 힌트는 「열매를 꿈꾸며」에 나온다. 스스로 순을 밀어 올렸다. 망울을 터트리며 봉오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페리호를 탔다. 그의 여행의 시작이다.

 

 

 

양철집, 겨울

새들은 늘 날개로만 흘쩍거린 느낌이었다

 

여자는 커서 더럽혀질 거랬어. 소녀는 아주 오랫동안 자기 발목을 깎았고 이제 부러질 것 같은 발목을 안심하며 바라본다

 

양철집, 겨울

새들은 날아간 만큼 죽어 있는 느낌이었다

 

휴학해, 우리는 니가 아무리 날아올라도 추락한다고 생각할게 추위와 더위를 착각하면서 하루 종일 그네를 탔다 딱 한 걸음 분량의 증발과 함께

가로수 수리점엔 의족처럼 나무들이 눕고

성냥개비 모양의 남자들이 때를 벗기는 꿈 코를 푸는 꿈

 

이제부터 나는 잎사귀를 떼고 겨울의 방향으로 10년은 더 걸어야 한다

 

양철집, 겨울

새들은 내려오는 형식의 사닥다리를 잃고

뒷굽이 많이 닳은 구부정한 물을 마셨다

 

지워지는 것에 대한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양철집, 겨울

고구마 스탬프로 새를 볼 수 없는 계절을 찍는다

 

- 「새를 볼 수 없는 계절」전문 조연호 제2시집 『저녁의 기원』 2007

 

 

 

제2시집 『저녁의 기원』이다. 이제 시인은 아예 도서관에서 살고 있다. 과학, 수학, 천문, 미술, 음악을 포함한 인문백과사전을 열어두지 않고는 그의 시를 읽어 나갈 수 없었다. 한 문장을 나가기가 힘이 든다. 불편함의 극치이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낯선 여행지를 가이드 없이 홀로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대부분은 낯선 여행지보다 집이 더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가끔은 여행지의 낯섬이 평화를 줄 때가 있다. 일상의 발견이나 가족, 아니면 사랑에 대한 경험을 사실적으로 녹여내어 가슴을 치게 하는 시들, 가슴을 치는 순간 내 안에 얽힌 일상이나 가족, 아니면 사랑이 더불어 녹아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간혹 눈물짓기도 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렇게 모든 것들을, 그것이 아프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일지라도 그것들을 모두 소화시키고 정제시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을 소화시키지 않은 그대로 마치 체증처럼 가슴에 쌓아두고 싶은 순간도 있다. 무거워하면서도 그것이 소진되는 것은 어느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은 고통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겹겹이 묻어두고 싶은 순간도 있는 것이다. 조연호의 시들이 그렇다. 많은 타인들의 사연들이 나온다. 그 사연들은 그가 사용하는 낯선 단어와 뜬금없는 문장들의 배열로 스스로의 이야기 즉 서사에서 추측할 수 없도록 장치를 취하지만, 결국은 가슴 속에 꼭꼭 덮어둔 시인의 사연인 것이다. 시인 또한 드러내고 싶지도 사라지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가슴이 무겁고 간혹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가슴팍에 쟁여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로 그것들을 덮어두었다. 그의 시를 처음 대하는 나는 시인의 가슴에 묻어둔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사방에서 끌어다 묻어둔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그 안에 묻어둔 것이 대충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될 뿐이다. 여행지라는 공간은 모두 낯설다. 땅의 색깔, 하늘의 크기, 사람들의 말소리, 먹고 마시는 것들까지도 모두 낯설다. 하지만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내 안의 것들을 집안에서와 같이 알몸으로 돌아다니면서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그것들을 가슴에 쟁여두고 낯선 여행지의 삶으로 설 덮어놓고 싶은 때도 있는 것이다. 일상이나 가족, 사랑에서 받는 모든 것들을 그것이 상처일지라도 모두를 정리하고 내려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조연호 시인의 어슴푸레한 저녁처럼 그렇게 설핏한 어둠으로 묻어두면 되는 것이다. 선명하게 말 할 필요가 없는 때도 있는 것이다. 조연호 시인의 제 2시집 <저녁의 기원>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단어와 문장의 해석을 포기하고 말이다.

 

 

 

 

내 귀소(歸巢)엔 단 두 개의 직전이 있었다.

-「근친의 집-모계」중에서, 조연호 제2시집 『저녁의 기원』 2007

 

 

 

오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우주가 검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

태양은 나눗셈에게로 꾸준히 가까워지고 0에 더 가까워지고

일제 탁상시계를 들고 아버지가 사우디에서 오시던 길

-「벌레를 쥐고 태어난 아이(1983-1986」중에서, 조연호 제2시집 『저녁의 기원』 2007

 

 

 

벗어놓고 간 신발의 숫자만큼 새로운 이별이 생긴다

연인의 편지는 노래 가사를 적거나 코 푸는 종이로 썼다.

내가 나의 껍질에 대해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귀는 붉어지기 위해 내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베개의 책」중에서, 조연호 제2시집 『저녁의 기원』 2007

 

 

 

 

가장 앞 장엔 월병(月餠) 맛의 태양이 자라고 맨 마지막장엔 아이들의 썰매가 내려온다//

1월은 바람이 벗어놓은 구두의 수를 세고 아이들이 야위는 방//

3월엔 너의 방을 구름으로만 채우려고 가족들이 세상에서 가장 긴 못을 쳤다.

-「홀수의 달력」중에서, 조연호 제2시집 『저녁의 기원』 2007

 

 

 

달이 노랗고 살찐 난소 덩어리로 자란다. 수납장 맨 아랫칸에 개어놓은 기억이 어느날 아름답게 자란 소음순(小陰脣)을 보여줄 때, 양(羊)의 해에, 엄마, 누나가 썩은 감자알같은 애를 낳았어. 처량한 표정의 애를 낳았어. 부서진 담벽에 묻은 은빛 에나멜은 가로등 불빛보다 먼저 우화(羽化)하며 골목으로 날아올랐다.

-「저녁의 기원」중에서, 조연호 제2시집 『저녁의 기원』 2007

 

 

 

 

제 2시집 『저녁의 기원』중의 몇 편을 옮겨 놓아보았다. 제1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에 비해 단어들은 더욱 건조해지고 시인은 시와 더욱 멀어져있다. 그런데도 그 쓸쓸함은 더하다. 제1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에 그나마 등장하던 구체적인 서사는 사라졌다. 납득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므로 이미 현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더욱 더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는 시인에게 과거란 어쩌면 살아가는 유일한 근거이다. 그것은 이 시집 1부에 있는 ⌜근친의 집⌟에서 그 근거를 둔다. ⌜근친의 집⌟에서는 마치 고대의 신화를 이야기하듯 과거들이 산재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근친의 집⌟의 집을 통해 원죄로 규정한다. 영원히 끝낼 수 없는 삶이 가지는 ‘원죄’를 인식한다는 것은 완벽한 절망이다. 그래서 시인은 현재를 부인한다. ‘원죄’를 자기자신을 ‘인식되지 않는 다른 세계’에다 가져다 놓았다. 그래서 현재에는 시인 자신이 없다. 존재 않은 삶에 대한 ‘희망’ 과 연관된 미래는 찾아볼 수 없는 우주 한 가운데 서 있는 그를 다시 볼 수 있다.

그가 시작한 여행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 줄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서 있는 현재 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 [천문]을 본다.

 

 

 

하늘의 문자에서는 분무 살충제를 뒤집어 쓴 벌레처럼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전주의자로서의 나는 별의 운동을 스스로 지켜볼 수 있기 때문에 별과 나 사이가 투명하지 않다고 여긴다.

전달에 대한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성난 가족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분노에서는 평화로운 멜로디가 떠올랐다.

 

달 앞의 우리는 외양간 같은 영혼을 숨기기 위해 작은 판이 되어 있었다.

내가 너를 갚아줄 것이다.

물 밖에서 자기의 이해되지 않는 몸을 바라보았던 흔적이 밤에겐 적혀 있다.

내가 너에게 겨를 묻혀줄 것이다.

 

묵매를 치던 사람,의 별자리/ 모음이 올 자리,의 별자리

서로 헤어지지 않도록 별들을 내게 악취를 모아주었지.

 

내가 만약 해바라기라면 내 얼굴을 조각조각 나눠들고 가을의 아이들은 나를 떠난다.

그런 나는 텅 빈 구멍마다 삶은 빨래를 집어넣고

고장 난 얼굴이 되어 아이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고대 이야기가 입방체에 관한 이야기의 용사인 것처럼

그가 내게 개구리들을 보내셨다.

밤마다 물가에선 따라 부르기 비좁은 애곡이 들끓고

나의 막대가 나에게 주는 고마운 자해 때문에

이불 밑이 부끄러운 줄도 지켜지는 줄도 몰랐다.

 

웅덩이와 달라붙은 남자여, 나는 소년의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 이별은 보통의 추위처럼 격벽 밖에서 쓸쓸한 것들과 달라붙고 있었다. 깊은 잠을 상속 받은 사람은 (자동)떨어지다, (타동)떨어지다, 이등변에서 얼마만큼 탈락의 넓이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붙이면 없어지는 그런 표현이 된다.

 

가장 밑에 고인 바람을 움직이기 때문에 나는

머나먼 인간을 별의 이행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계는 방점에서 결점으로 이행한다.

나는 소맥을 한 줌 쥐고 <그리하여, 만일>이라는 우주 한가운데 떠있었다.

 

-2009.5 현대시천문전문

 

 

 

⌜왼발을 저는 미나⌟의 모습으로 방을 나온 시인은 우주에 있다. 아마 페리호에서 다른 어떤 탈 것으로 옮겨 타기도 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의 인문학에 빠져있어 스스로 고전주의자라고 자처했을 시인에게 별의 시간은 밤의 시간이다. 밤은 공간이 없는 것 혹은 한 덩어리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운동체가 전달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가 별을 보며 소원했던 것들이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인의 과거- 유년을 지배했을 자신과 가족의 일상적인 고난들이 우주에 떠있다. 별을 향해 보냈던 기원들이 별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그래서 생겼을 분노 또한 별이 되어 별의 멜로디가 되어있다. 절박했던 과거들이 우주에서는 평화롭다고 전한다. 달 앞에서도 ‘물 밖에서 자기의 이해되지 않는 몸을 바라보았던 흔적’이 있었고, 별자리들은 과거의 흔적들이다. 하지만 시인이 지칭한 그가 보내 준 것은 애곡(哀哭)을 하게 만드는 ‘개구리’였고, ‘이불 밑의 수치’였다. 그것이 지금도 시인이 넘지 못하는 현재를 살고 있는 현재이다. 시인은 ‘가장 밑에 고인 바람을 움직이기 때문에 나는/ 머나먼 인간을 별의 이행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계는 방점에서 결점으로 이행한다./ 나는 소맥을 한 줌 쥐고 <그리하여, 만일>이라는 우주 한가운데 떠있었다.’ 시인은 공상과학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 ‘평행우주’의 이론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그가 아닌 또 다른 그가 우주 어디엔가 있다고 믿고 그 우주를 만나기 위해 한 줌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기다린다.

 

 

 

물결이 오고 있는 곳은 이야기의 끝 약 이백 페이지 남짓한 지점이었다. 편지는 날아올라 그것을 본 내게 별이 더 이상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우주가 시작된 곳은 어디인가’ 하는 질문에 천문학자는 ‘그것은 그것의 내부에서 온다’고 대답했다.

 

첫 이야기는 죽은 것을 포란하는 어떤 성조(成鳥)에 관한 것이다. 자침(磁針)의 방향은 발바닥을 들고 도서관의 나를 기다렸다. 책이 동물의 배태(胚胎) 같았기에 나는 그 책의 산도(産道)를 향해 새가 날고 있다고 여겼다.

 

방충망 틈으로 잔잔한 환역(寰域)이 와도, 잔잔함의 부피는 방충망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시간 역시 발바닥을 들고 내 귓전으로 두 다리를 데려오고 있었다. 선천의 혹은 후천의 애인들에게 사람들은 감격했고, 토론했고, 비탄에 빠졌다.

 

죽은 동물의 머리 뼈 안에 꿀을 만드는 벌의 이야기다. 서쪽의 별자리는 소변을 모아두는 작은 두개골 같았다. 옥상이 구름을 열광하더라도 잘 찢어지는 종이공예품 같은 성감대를 탓하지는 말자, 사람은 확신에서 신비를 얻기도 하는 거니까. 밤은 신발처럼 뒤엉킨 우리들의 절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할아버지여, 저 괴로운 별이 자기 발을 닦아달라고 울부짖고 있어요. 오래 물었던 구중청량제를 역연(逆緣)의 별에게 뱉는다.

 

또 다른 이야기<오케아노스의 일곱 딸>에서, 옆집 아저씨가 깨진 망원경에게 ‘서쪽 하늘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말한 건 너무 슬펐다. 오케아노스의 일곱 자매는 반신(半神)을 배고, 오줌 누기가 힘들었다. 내 베개는 종종 엄마의 발목 자국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더러 인간을 사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별도 있었다. 임신중독, 그것이야말로 밤하늘을 무심한 것으로 상상한 자의 증상이었다.

 

-「점성(占星)의 성속사(聖俗史)」 전문, 현대시 2009.5

 

 

 

물결이 오고 있다고 시작한다.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편지는 날아올라 그것을 본 내게 별이 더 이상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사랑을 만났다. 그리고 사랑은 새로운 우주의 시작이었다. 천문학자의 말을 빌려 우주는 우주의 내부에서 오는 것이고, 사랑 또한 그렇다는 대답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의 첫 사랑의 대상이 의심스럽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을 품고 있는 성조(成鳥)라는 것이다. 시인은 사랑하는 것들을 도서관에서 찾으려 한다. 죽은 알이라고 말을 하면서 말이다. 철갑을 두른 시인이다. 꼼짝 않고 들어앉은 시인에게 세상이 와도 상관없다. 사람들이 절망한다. ‘오래 물었던 구중청량제를 역연(逆緣)의 별에게 뱉는다.‘과 ‘더러 인간을 사랑한 것을 부끄럽게 여긴 별도 있었다. 임신중독, 그것이야말로 밤하늘을 무심한 것으로 상상한 자의 증상이었다.‘에서 보듯이 그는 스스로 고립시키는 중이다. 그는 스스로를 별이라고 띄워놓고, 빠질 수밖에 없는 주위의 별들과 속(俗)된 것들에 빠지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구별하고 있는 중이다.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여 스스로 성(聖)의 세계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박이 있다. 이것 또한 속의 범주에 있을 절망에 대한 두려움에 근거한다.

 

 

 

너의 다리에서는 새로운 웃옷의 냄새가 났다.

머리칼을 자르고 거기에 두 다리를 붙이면 입맞춤을 하면서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불을 끄면 네게로 떠날 새들이 작은 부리로 나를 조각조각 나눠가졌다.

나는 부종으로부터 온 것, 둥근 밥그릇을 배에 엎어놓고

입덧하는 이 신체를 나빠하고 있었다.

-「지저귀는 발」일부, 현대시 2009.5

 

 

 

우주 가운데까지 와서 멈춰있는(기다리는) 그는 별과 헛된(그의 뉘앙스로 볼 때) 사랑을 한다. 그러고도 그는 점성과 박물관의 언어들로 겹겹이 포장을 하여 사랑의 실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절망의 바닥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내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드러나면 다시 바닥으로 내 몰릴 것 같은 공포 때문이다. 「지저귀는 발」은 장시라고 볼 수 있다. 그의 특기인 낯선 단어들이 곳곳에 배치되고, 문장이 낯설게 배치시키면서 그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으려 포장을 했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것은 결국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이 연은 시인의 그동안 시 서술방법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겠지만, ‘입덧하는 이 신체를 나빠하고 있었다.’ 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의 욕망 혹은 감정을 부정하고 억제한다.

 

위의 시의 경우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나’라는 설정을 두고도 멀리 떨어져서 타자의 이야기인 듯 풀어내고 있지만, 과거라는 지점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의 발아래를 보고 있던 첫 번째 시집과는 달리 근래의 시들은 과거나 현재 혹은 미래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자신과 독자들을 세워둔다. 이 모호함은 실재(實在)의 자아와 시적 자아의 구별, 독자와 시인과의 구별을 위해서이다. 구별을 위해 시어들의 환유를 통한 대치뿐만 아니라 용사(用事)까지 사용하여 더욱 그 모호함을 매진한다. 이런 모호함은 개념의 확장에 한 몫을 하는 반면 독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불편한 시가 되었다. 김춘수 시인은 ‘현대 사회는 회의의 시대이고 가치가 해체된 불편한 시대인 만큼 불편한 시가 많다’고 말한 바 있다.

 

 

 

무연고의 이름으로, 준말의 신분으로, 바람은 잃은 것들을 만난다.

 

물결을 걸어서 그는 어부들과 함께 소금이 걸어오는 세상을 바라봤다. 그림자는 귓속을 흐르는 얉은 소리를 따라 자기 그림자를 건넜다. 너의 가장 굵은 엄마에게 작은 발을 남겨두려고 뱀이 태어났지.

 

처음의 거리는 입에 몰두하는 재봉선을 만들어 주었다.

-「발 아래」일부, 현대시 2009.5

 

 

 

이 정도이면 독자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들려고 아예 작정을 한 듯싶다. 의도적으로 시 안에서 일탈, 뉘앙스가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이것은 회의의 시대이며 불편한 시대에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시를 만든 것이다. ‘무연고의 이름으로, 준말의 신분으로, 바람은 잃은 것들을 만난다.’ 라는 시의 도입처럼 어떤 형체도 없는 바람을 ‘무연고’ ‘준말’을 사용하여 과거의 세계를 다시 복원한다. 그렇게 복원한 과거를 현재의 발아래 나란히 놓는다. 시인은 「지저귀는 발」「물가에서」「맹지」등은 이제 더는 어떤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가진 문장들을 배치된다. 이것은 마치 잠자리의 겹눈을 가진 시인이 겹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말하여 여러 문장들이 하나의 서사로 관통되지 않고 그저 우주에서 별 하나가 산산이 부서져서 그 원래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모습 그대로 어떤 아름다움을 주는 모습이다. 여기에 시간의 흐름은 아예 없거나 멈춤과 멈춤이 있는 문장들을 뒤죽박죽 배열하여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였다. 이것은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독자와 함께 그 인식을 공유하는 인식의 전달체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그저 정서적 전달체로서의 언어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낯선 여행지이더라도 한 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몸에 낯선 여행지의 냄새에 취하기 시작한다. 취중에 그를 이해한 느낌이다. 깨고 나면 언제 내가 너를 이해한 적이 있었나 싶게 다시 처음처럼 시인의 말 한마디를 이해할 수 없을 런지도 모른다. 이것은 제 1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에서 시인이 보여준 과거청산 프로젝트는 100미터 떨어져서 자신을 찾는 것이었다면 2009년 조연호의 시에서는 시인 자신은 너무 멀리고 가버려 존재 자체가 없는 듯 하다. 이것은 자신이 없는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없는, 절대 자신이 있었던 적도 없는 공간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대치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자신을 찾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취중에 만났던 시인이 어느 곳에 있었던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다시 만나더라도 낯설 것이다. 하지만 다시 동행을 한다면, 그가 없다는 시간을 느낄 수 있을런지 모른다.

 

 

 

 

2. 입방체 밖으로 나오다

 

 

그가 살고 있는 공간을 그의 시어인 <입방체(立方體)>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의 시를 보는 순간 대면하게 되는 단단한 벽, 그것은 너무나 단단하고 완고해서 한동안 그 앞에서 서성이게 만들고 몇 번이나 돌아서게 만든다. 하지만 그냥 모른다하고 돌아서기에는 뭔가 익숙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시에서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가던 걸음을 멈추어 그의 입방체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은 무엇인지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그의 시를 벽돌-단어, 방-문장, 집-시로 이루어져 있다.

 

 

(1) 환역 단어

집을 지을 때, 구조나 방향, 위치에 따라 그 집의 가치가 달라진다. 하지만 그 집의 성격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것은 자재이다. 그는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오래된, 혹은 사전적인, 과학적인, 그러니까 일상단어가 아닌 특수한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이러한 단어를 왜 사용하였을까? 그는 한 달음에 쓰는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벽을 쌓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시로 쓸 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로서는 그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고 규정지었다. 일상단어들은 이미 우리들에게 익숙하게 사용됨으로써 단어의미로는 그 해석의 폭이 한정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상에서 흔히 사용됨으로서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은 단어를 찾는다. 그리고 환역법에 의해 단어를 대치하고 재구성, 재편성한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나 숙한 단어들보다는 사용되지 않는 박물관 단어들이 그로서는 훨씬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한자어 중에서도 자주 사용하지 않은 단어들을 끌어옴으로서 내용적으로 보면 개념화를 원활히 수행하고, 외적 이미지로는 일종의 낯설게 하기에 성공한다. 또한 이런 류(과학용어, 수학용어, 용사 등)의 정교한 언어 사용은 그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애매모호함을 강화하는 듯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그 용어들이 주는 견고한 느낌은 그 반대로 애매모호함은 극복시켜주기도 한다. 기꺼이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사전을 열어두도록 했다. 외양이 그렇게 이해했으나 이것은 소통이라는 점에서 보면 참담한 경험이다.

 

 

(2) 큐브 문장

낯설고 어려운 단어들의 행렬이 문장인 듯하지만, 자세히 문장을 뜯어보면 문장 하나하나에서 이해되지 않을 것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잠언식의 문장표현은 어쩌면 다른 시인의 시에서 보다 훨씬 분명한 문장이다. 그래서 한 문장 한 문장을 뜯어놓고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마저 든다. 바로 방이다. 한 편의 시가 방이라는 공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서는 문장이 방이 된다. 방의 주인이 각각이며, 용도가 각각이듯 한 편의 시에서 각 문장의 방향이 다르다. 여러 개의 방에 난 창이 모두 다른 방향이듯이, 그래서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이 모두 다르듯이, 지각변동이 일어나 융기한 땅의 모양처럼 한 편의 시 안에서 문장들의 앞뒤를 꿰어 맞추려면 매순간마다 입방체모양의 큐브처럼 시간과 공간을 맞추어야 한다. 한 편의 시에서 낯선 단어 몇 개와 문장의 방향을 흔들어서 그것이 개념을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직아이처럼 한참을 그저 바라봐야만 눈이 익숙해진다.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서술이 거의 없었으므로 시간을 필요로 한다.

 

 

(3)입방체 시

몇 개의 낯선 단어와 한 문장으로서는 손색이 없지만, 시제와 공간을 달리 하는 문장들의 배열로 한 편의 시가 이루어졌다. 간혹은 몇 줄이라도 문장이 인과를 확보한다 싶다가도 단두 세 줄을 참지 못하고 다시 뜬금없는 문장이 다음을 잇는다. 단어와 문장과 시 한편, 그나마 한 줄의 문장만 익숙할 뿐이다. 문장을 깨지 않았다 싶더니 문장의 조합인 시 한편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껄끄럽고 힘들다. 그의 시에서 완결된 서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 때문에 시인은 이러한 혼란스러움으로 시작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주 오랜 옛날 지구가 지각변동을 일으켜서 몇 억년의 시간동안 만들어진 지층이 융기와 침강을 일으키며 질서에서 벗어난 그때의 무엇을 알려면 지층을 따라 찾아들어가야 그 시대의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층으로 이루어진 땅의 단면을 보면 다른 곳 보다 훨씬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간혹 위압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시는 그렇게 잘라진 절벽으로 이루어진 입방체라고 본다. 그래서 그의 시는 생긴 그대로 모난 세상이면서, 외부에서 흔들어도 흔들릴 수 없는 모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입방체는 외부세계의 시선에 따라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다. 공간이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각 문장의 배열이나 생략으로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적 공간을 만들 수도 있고, 관념적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지층으로 이루어진 벽면을 본다면 그것은 그저 벽면일 따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본다면, 우리는 상상한다. 높낮이가 다른 지층을 보면서 그 시간, 그 움직임을 상상한다. 그리고 움직임 안에서 살았을 생명을 상상한다. 확장이다.

 

시인은 일상적인 단어와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흐름과 같은 인과관계를 져버림으로서 한 편의 시 안에서 우주와 같은 공간과 우주의 역사를 담을 정도의 시간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옥죄는 듯한 단어와 문장들을 사용하여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처음 그의 시를 해독하는 것으로 시작을 하였지만, 그의 시는 단어나 문장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언어가 주는 묘미와 분위기로 읽어야 한다. 한 단어와 한 문장의 의미를 찾기 보다는 시인이 만들어준 시간과 공간을 받아들이면, 그가 살고 있는 입체세상인 입방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각자 보이는 대로 보기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바로 이 때 커다란 공간과 시간의 깊이와 그 안에서 맛보는 자유, 그것은 흐린 날들이더라도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쓸쓸하게 녹아 없어진 초의 개수를 매일 밤 처음부터 다시 외워보며

그대도 나처럼 신비한 불결을 향해 잠들어라

-⌜고전주의자의 성⌟ 부분, 2009.2. 현대시

 

 

 

 

3. 멀리서 본 입방체

 

 

과거는 결합된 세상이었다면 이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산산이 부서져서 객체화된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객체화된 세상에서의 시간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시간의 의미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조연호 시인의 시에서는 타인과 같은 시간의 속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입방체라는 세상 안에서 철저히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만의 시간속도로 살아간다.

 

그의 시에서는 ‘삶’이라는 의미의 현재도, ‘꿈’ 혹은 ‘욕망’으로 대치되는 미래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론적으로 과거만 존재한다. 그는 시에서 자신을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절망으로 끌어들인 과거의 실체를 찾고자 한다. 그는 그의 과거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어느 공간에서 과거를 찾고자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사람들과 분리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찾는 과거가 있는 우주 어느 공간에서 현실이 아니었던 추상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장에 보면, 문장 자체에서 미학은 볼 수 없어도 현실적인 문장이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 어쩌면 가장 현실과 닮은 단어를 찾고 문장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한 것일런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현실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단어들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현실적인 단어를 썼을 때 그가 찾은 현실(?)이 달리 해석될 수 있기에 지독하게도 낯선 단어들을 찾아 헤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쓰이는 단어들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그대로의 잔혹함, 그리고 그 후에 오는 쓸쓸함을 동반한 감동, 혹은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그가 시에서 표현하고자하는 그의 정조(情操)이다. 그는 도덕이 배제된 오직 어느 시점의 정조를 표현하기 위한 단어를 구한 것이지 단어 자체 그리고 문장 자체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의 세세한 사건이 아니라 과거, 어느 시점의 현실로 인한 상처로 현재도 미래도 없는 자신의 정조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지독히도 쓸쓸하게 몰아가고 그 가운데 다시 자신을 세워두고 지겹게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간혹 시인에게서 새로운 절망을 만날까봐 두려워 익숙한 과거의 절망들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 사이 시인은 낙천성을 가지게 된다. 서사의 구조 속에서 사유하고 관념하고 규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밝더라도 끝이 있는 미래를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서사구조에서 벗어난 시인의 사유는 차라리 자유롭다. 자유로움은 낙천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읽어내기가 힘들다는 조연호 시인의 시가 읽히는 것은 바로 이 굳은살이 박힌 발바닥을 가진 자의 자유로움 때문이다. 쓸쓸함의 극치인 시를 읽음에도 시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은 그 안에 바로 어디를 가더라도 걸어낼 수 있다는 낙천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조연호 시인의 시는 서사의 형식을 띠지 못했지만, 그의 시작업은 서사 형식이다. 등단시부터 제 1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과 제 2시집 『저녁의 기원』을 지나 우리가 다루고 있는 2009년 ⌜천문⌟등의 작품세계를 이어가다보면 그가 향하는 세계가 한 가닥으로 엮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출발점은 분명히 그의 유년이다. 그 중심을 놓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계절』에서는 현재를 굳이 염두에 두지는 않았지만 되새겨야만 하는 과거의 지점으로 돌아가 자아를 확인하였고, 『저녁의 기원』에서 시인은 과거에다 중심을 두되, 도서관으로 발길을 돌려 인문학을 통해 보는 자아를 확인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우주 한 공간에다 자신을 두었다. 그리고 살지 않은 자신을 통해 시인이 존재했던 자아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인 시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조연호 시인의 색이 선명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정도의 속도로 그의 시작의 서사가 계속된다면, 어느 순간 그의 중심축이었던 ‘자아찾기’는 사라지고 인문학이나 우주공상과학의 경계에서 미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에 쓰이는 단어나 문장은 언어에서 시금석과 같은 것이다. 시인으로서 새로운 언어영역과 새로운 의미도출을 해낸다는 것은 언어생산자로서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의 기능은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 시의 기능에 대한 정리를 하고자 한다.

미국의 계관시인인 아치볼드 맥클리쉬의 ⌜시법⌟에서 ‘마치 달이 어둠에 얽힌 나뭇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놓아주듯이/ 겨울 잎사귀에 가린 달처럼 기억을 하나하나 일깨우며 마음에서 떠나야 한다./시는 시시각각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에 나오는 이 구절이다. 달과 나무에 빗대어 시와 시인이 나누는 감정의 연결고리를 설명하고 있다. 시는 단순히 사물의 모습이나 현실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는 이미지 속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조와 빗대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달은 나뭇가지의 어둠을 씻어주고, 나뭇가지는 달에게 자신의 기억들을 나누어준다. 시와 시인의 교감이며, 시인과 독자와의 교감이다. 예술사에서 울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활자라는 단편적인 도구와 좁은 지면만이 필요한 ‘시’라는 장르가 예술의 핵으로서 오랜 시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의 고전인 ⌜시경⌟에서는 ‘시즉절(詩卽切)’, ‘시는 절실함’이라고 했다. 시의 절실함이 시인의 창작을 좌우하는 잣대라면 독자가 시를 받아들이는 잣대는 마음의 울림인 것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시인이란 마음속으로는 남모르는 고뇌에 고통을 겪지만 그 탄식과 비명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바꾸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이라고 말했듯이 태생적으로 비극적인 갈등과 상처를 지닌 시인들은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시인생활에 들어설 수 있지만 그 비극성에 스스로 중독되어 스스로를 가둔 채 자신의 상처를 키우고 들춰내는 일을 반복하기도 한다. 리얼리티의 함정이다. 시예술은 결국 개인적인 상처나 갈등을 여과하면서 보편성을 획득하거나 사소한 것들에서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는 장치이다. 시인의 극대화된 상처와 갈등이 극적으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이미지화라는 장치를 통해서 시인과 독자가 함께 그들의 과거와 화해를 해야 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시인의 시작이 계속 되는 동안 시인이야 어떻든 시인의 개인적인 상처와 갈등은 현재에서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우주로 떠났다. 그래서 시인 자신과는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리얼리티와 상상력의 균형이야말로 독자로 하여금 리얼리티통한 공감과 상상력을 통한 화해의 단계를 거쳐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야 말로 시인의 공적 의무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언젠가 나오게 될 조연호 시인의 제 3시집에서 우리는 그가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그의 선택이 어떠하였는지 읽어나가면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0) 2009.07.03
[조현석] 빠진다  (0) 2009.06.22
[조연호] 천문  (0) 2009.05.29
[조연호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0) 2009.05.25
[조연호] 루오상회에서의 일들  (0) 2009.05.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