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혼자
박 상 순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 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 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나는 삼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1 너 혼자 말해볼 수 있겠니
2 너 혼자 만져볼 수 있겠니
3 너 혼자 돌아갈 수 있겠니
바스락 바스락, 안개 속에 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하지만 기운을 내렴
한때 네가 두들기던 실로폰 소리를 기억하렴. 나는, 나는, 나는, 심십과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딩동동 딩동동, 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내 소리를 기억하렴. 하지만.
1 너 혼자 내려갈 수 있겠니
2 너 혼자 눈물 닦을 수 있겠니
3 너 혼자 이 자욱한 안개나무의 둘레를 재어볼 수 있겠니
왜?
왜 그래야 하는데?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너 혼자 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너라고 부르면서.
너라고 부른다는 것은 바로 너의 앞에 있다는 것일텐데... 코앞에 있는 나를 두고 어째서 너혼자라는 말을 하는건지.
1 너 혼자 올 수 있겠니
2 너 혼자 올라올 수 있겠니
3 너 혼자 여기까지 올 수 있겠니
안개가 자욱한데.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니. 하지만 다행이구나 오랜 가뭄 끝에 강물이 말라 건너기는 쉽겠구나. 발 밑을 조심하렴. 밤새 쌓인 적막이 네 옷자락을 잡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건너렴.
아...
어떻게...
혼자 오라면서, 안개도 자욱하다면서, 건너기가 쉽겠다고? 그런데 또 조심하라고... 조심해서 건너라고..
그렇게 걱정이 되면 몇 발자국쯤 내게 다가오면 안되는거니?
몇 발자국만이라도...
불빛이라도 비춰주면 안되는거니?
흔들리는 촛불이라도...
나는 삼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또 나는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너.
팔짱을 끼고 내 한 걸음 한 걸음을 살피고 있는 너.
자를 들고 서서 나를 기다리는 너를 버리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1 너 혼자 말해볼 수 있겠니
2 너 혼자 만져볼 수 있겠니
3 너 혼자 돌아갈 수 있겠니
그런다고 약속했었지.
난 이제 혼자 말하고, 만지고, 갈거라고 약속했었지.
그런데 혼자라면서 왜 혼자 두지 않는건지.
그런데 혼자라면서 왜 나를 보는건지.
그건 혼자가 아니지.
혼자가 아니라... 둘도 아니라... 셋도 아니라... 뭣도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닌게 되는거지.
바스락 바스락, 안개 속에 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네가 네 청춘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리는 구나. 하지만 기운을 내렴
못해!
뭘 어쩌라고!
뭐가 달라지는건데!
내가 내 청춘을 밟는다!
기운을 내어 청춘을 무참히 밟아버린다. 그리고 말하지.
무참히 죽여버렸어. 나 혼자서.
한때 네가 두들기던 실로폰 소리를 기억하렴. 나는, 나는, 나는, 심십과 사십 센티미터의 눈금을 들고, 줄자를 들고, 홀로 오는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딩동동 딩동동, 네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내 소리를 기억하렴. 하지만.
1 너 혼자 내려갈 수 있겠니
2 너 혼자 눈물 닦을 수 있겠니
3 너 혼자 이 자욱한 안개나무의 둘레를 재어볼 수 있겠니
실로폰소리가 들리는 그 때를 기억한다고 모든 것을 돌릴 수 있다면... 매일밤 시계를 돌릴거야. 쉬지도 않고 돌릴거야.딩동동. 딩동동.그래, 손가락이 내 주머니속에서 실로폰을 두드린다.단 하나의 소리.단 하나의 울림.섞임이 없는 실로폰소리가 쟁쟁 울린다.몇 개의 마음이 아닌 딱 하나, 혼자 마음이 쟁쟁 울린다.소리가 혼자서 나를 건넌다. 나를 건너 저 멀리로 떠난다. 소리가 떠난 뒤, 나 혼자...
오던 길을 내려가다보면.. 왔던 길을 하나둘 기억해내다보면...넌 알고 있었다.내가 무엇을 기억해낼지. 이 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날런지를... 다 알면서 보낸다.
넌, 자를 들고,나와 너의 거리를 재고,나와 내 기억의 거리를 재고,내가 지나야할 안개 가득한 길의 거리를 재고...
넌, 앞에 서서 너 혼자 그 길을 가야한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 받는다.몰아친다.
갈테니, 삼십센티 자도 버리고 사십센티 자도 버리고, 줄자도 버리고... 그저 갈 터이니, 다 버리고 갈 터이니, 나를 버려다오.나를 기다리지 말아다오.나 혼자 갈테니, 같이라는 말은 절대 쓰지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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