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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경미]밤, 속옷 가게 앞에서

by 발비(發飛) 2007. 7. 26.

밤, 속옷 가게 앞에서

 

김경미

 

마음의 길들이 다 아프다 덜어내고 싶은

마음이 흐려지는 시야......

 

세상에서 상처받은 날이면

밤의 정류장 속옷가게 앞에 서서

내의만 입고 선 마네킹들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그들 몸 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 나빗빛들,

유리 건너 눈부시게 날아들 때마다

견뎌다오 나여, 한 번만 더 견뎌다오,

무엇이 그리 대단히 슬프고 아플 것인가

혹은 짐작지 못한 고통도

혹은 있지 않았으면 싶은 어둠도

몸빛을 돋우려는 저 검정 슬립 같은 것

그 가슴 한가운데에 놓이는 작은 꽃 장식 같은 것

밖은 아무래도 괜찮다

몸  속 거기, 아름다운 것들 거기 다 모여

불빛 켜들고 몸 밖까지 나가는 나비색 불빛 켜들고

가슴안에 다, 거기, 모여 있으며

무엇인들 아플 것인가

밤 속옷가게 앞에서 문득 눈물 고이니

 

그렇게 세상을 또 한 번 건너가라고

신호등도 비로소 푸른 빛이다

 

 

 모든 것을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

속엣말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조차 몰랐던 말들.

내가 말을 하고 나서야 내안에 들어있었구나 하고 되새김질을 해야 하는 말들.

되새김질 할 때조차 생각나지 않는 나의 말들.

그 말들까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말을 하고 있지 않아

그래서 종일 말을 하게 되는 .... 종일 주절거리게 되는,,, 종일 떠드는 수다스러운 여자가 되어버린 ....

그 순간에도 난 말을 하고 있지 않아,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데...

 

시인이 마주한 건널목앞 속옷가게.

마네킹안에는 하얀 조명이 전등처럼 켜져있고, 마네킹 위로는 마네킹의 아름다움을 빛내 줄 나비가 날아다니는데...

어쩌면 저렇게 벌거벗고 싶은 것인지도 몰라

검은 슬립 정도만 걸치고 길 가에 서고 싶은 것인지도 몰라

정강이에 있는  초등 몇 학년때 다친 길이 5센티의 상처도 조명발에 훤히 드러나고

눈썹 옆에 있는 택시와 부딪힌 2센티짜리의 흉터도 하얀 조명발에 투명히 드러나고

또 무엇이 있을까?

심장을 뚫고 나오는 저 불빛은

내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붉은 것이 아니라 검은 빛이라는 것도 만천하에 공개할런지도 몰라.

너무 적나라한 것이 싫다고?

그럼 레이스 장식이 화려하게 들어가서 눈길을 돌릴 수 있는 검은색 브래지어 하나쯤은 걸치면 해결되나.

검은 빛으로 퍼질 내 몸의 불빛들이 저 멀리 건너편까지.

 

말을 하고 싶어,.

내 안에 무슨 말이든, 내 안의 말이든, 내 안의 말이 아니든, 내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들을 주워담아

넓게 펼쳐놓고 조명발을 쪼이고 싶어.

밤, 속옷가게에 서 있는 저 마네킹의 길고 하얀 몸에는 말들이 더덕더덕 붙어있어

나도 알지 못하는 나의 말들을 모두 입고 있어

잠시 밤 속옷가게 앞에 서 있다가 눈물 몇 방울 그렁거리며 내 말들과 작별하고 건너편 초록불빛을 향해 냅다 달려가는 나

다시는 내 말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순간 변한 마음에 얼굴 붉히면서, 다시는 보지 않을 것 처럼 나빗빛 하얀 불이 환한 마네킹을 뒤로 하고 냅다 달리는...

절대 그 곳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냅다 달리는...

 

조그만 동네 건널목 앞 속옷가게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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