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에는 서머싯 몸의 작품들을 읽었다.
<달과 6펜스>, <면도날>, <인간의 굴래애서 1. 2>, <서머싯 몸 단편선>의 순서로 읽었다.
세 권을 모두 읽고 나니, <인간의 굴레에서>를 가장 먼저 읽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인간의 굴레에서> <달과 6펜스> <면도날>의 순서대로 읽으라고 말하고 싶다.
서머싯 몸의 세 장편을 읽고 든 생각은 거리, 관찰자, 인간에 대한 긍정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고 관찰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不可近 不可遠은 작가들이 흔히 가지게 되는 차가운 고립이 아니었다.
그는 타인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평정심을 지켜내는 가장 세련된 인간 사랑의 방식을 가진 작가였다.
한 작품씩 읽어나갈 때마다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거리가 부러웠다.
<달과 6펜스>를 첫번째 책으로 읽었다.
달을 잡기 위해 6펜스를 버리고, 자신의 꿈을 쫓기 위해 달렸던 스트릭랜드가 있고, 달을 쫓는 그를 추앙하는 몇몇이 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부터 죽음 이후까지도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다.
비난도 추앙도 아니다. 작품 속 작가의 시선은 일종의 동경처럼 보였다.
꿈을 쫓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물불 가리지 않고 매진하는 스트릭랜드의 선택에 논의해 볼만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스트릭랜드는 꿈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 외에는 붙들 것이 남아 있지 않았던 사람처럼 보였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배척되었던 한 사람이 스스로 살아갈 실마리를 찾고, 그 실마리를 붙들어 존재를 입증하며 생을 마감한 것 같다.
그의 난폭성은 끝까지 몰린 사람의 폭발, 생존본능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성을 가진 인간, 어쩌면 우리들이 뭔가를 원할 때 가지고 싶은 본능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두번째로 읽었던 <면도날>은 작가가 70세가 넘어서 쓴 작품이다.
(다 읽고 나서 집필나이를 보고 이해가 되었다)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래리는 면도날 같은 삶 속에 구도의 길을 선택하며 자유를 얻었다.
엘리엇이나 이사벨 등의 등장인물들이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선택이다.
래리는 면도날처럼 좁고 위험한 길이었지만 그 길을 아주 천천히 걸었고, 그 끝을 끝내 작가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이때도 작가는 마치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아니라는 듯 다른 작품들보다 더 강하게 거리를 두고 등장인물들을 관찰한다.
마지막으로 읽은 <인간의 굴레에서>는 서머싯 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했다.
엄청난 유년기, 청년기를 보낸 사람의 초연함이 이후 작품들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필립 케리는 유모의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엄마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고아가 된 필립은 절름발이 콤플렉스를 안고 목사인 삼촌 집에서 자란다.
신학교, 독일 유학, 회계사, 화가 등 뭘 해도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만 하다 런던에서 의대를 다니며 겨우 방향을 잡는 듯하지만,
웨이트리스 밀드레드에게 집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돈도 자존심도 다 잃는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가난, 굶주림, 실패를 다 겪고 나서야 필립은 깨닫는다.
삶에는 원래 정해진 의미같은 것은 없다. 그러니 그냥 내가 원하는 무늬로 짜면 된다.
어떤 순간의 사건들은 커다란 양탄자의 자신만의 특별한 무늬가 될 거라고 했다.
필립은 자신의 양탄자에 알록달록 무늬를 만들었고,
결국 의사 자격을 취득하고, 자신만의 소박한 삶을 선택하며 끝이 난다.
서머싯 몸의 작품들에는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주인공들의 아우성이 있다.
필립은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스트릭랜드는 묻는다.
"왜 살아야 하는가?"
래리는 묻는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서머싯 몸은 그들이 질문하고, 스스로 내놓은 답 중에 누구의 답도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필립이 틀리지도 않았고,
스트릭랜드가 옳지도 않았으며,
래리가 궁극적인 해답을 찾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41세의 서머싯 몸은 <인간의 굴레에서>에서 필립을 통해 평범하고 찌질한 한 인간이 자신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이었고,
45세가 된 작가는 <달과 6펜스>에서 충동적인 스트릭랜드를 통해 자신 혹은 타인과 치열하게 싸우다 자신은 사라지고 작품만을 남겼다.
<면도날>를 쓸 때 서머싯 몸은 70세, 작가는 래리가 스스로에게는 영적인 화두를 던지고 주변의 인물들도 측은하게 챙기며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를 썼다.
작가의 주인공이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 달라졌다.
필립도,
스트릭랜드도,
래리도,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었다.
서머싯 몸은 그들을 고치려 하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방치하지도 않는다.
그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끝까지 바라본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에게 실망하지 않는 가장 품위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온 세상이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까닭이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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