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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카프카] 변신- 연민

by 발비(發飛) 2026. 3. 17.

요즘 고전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을 느리게 느리게 읽고 있다. 

일기장에 짧게 메모하는 것 빼고는 읽으면 읽는대로 두었는데, 

카프카의 소설들을 읽고는 짧은 메모로는 머릿속이 복잡하다. 

 

다른 고전들도 그런데,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없고, 읽기는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카프카도 그렇다. 

 

카프카는 내게 철학자 모드이다. 

그가 쓴 소설보다 그를 따라다니는 초현실, 초자아, 부조리 같은 단어들이 더 강렬했던 탓일 듯 하다. 

 

[변신]을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기는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심각하게 이 소설을 읽었을까?

아까 말한 초현실, 초자아, 부조리 같은 단어들의 무게만이 남아 그렇게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같다고 추측한다. 

[변신]을 처음 읽은 뒤,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변신] 같은 이야기들이 웹툰, 웹소설, 드라마, 영화를 통해 등장했다. 

그래서 그 설정, 혹은 형식에 둔감해진 듯 싶다. 

 

반면, 가족이라는 것, 유대라는 것, 관계의 진정성이라는 것, 살아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연민이라는 것 등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일종의 이해라고 해야 하나. 

 

그때는 초현실이고, 초자아이고, 부조리로 받아들인 것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등장하는 모든 이들이 누구도 빠지지 않고 이해가 되었다. 

심지어 하룻밤 묵고 떠난 하숙생들까지도. 

 

그레고르는 벌레같은 삶을 살다가 벌레로 변해버렸다. 

단지 5년을 벌레처럼 산 것 같은데, 5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레고르가 버틴 5년 동안 벌레처럼 살뻔 했던 가족들은 인간답게 살아갔다. 

빚도 갚아나가고 그레고르 몰래 저축까지 하면서, 

그레고르의 꿈이었던 여동생의 아름다울 미래까지 5년 안에 들어있었다. 

 

그레고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가족들에게 버려지는 과정은 처절하다.

 

함께 수록된 [선고] 또한 [변신]에 버금가는 가족잔혹사다. 

아무렇지도 않는 날이었다.

게오르그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한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한 것 뿐인 날,

늙어 힘을 잃은 아버지는 화를 내고, 물에 빠져 죽으라고 한다. 

그렇다고 게오르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두 이야기 모두 부모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자식들 이야기이다. 

자식은 그렇게 부모 앞에서 허약하다.

반대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누가 누군가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느냐에 따라 가족잔혹사가 진행되는 것이겠지. 

이렇게 카프카의 소설이 읽힌다. 

 

끊임없이 안으로 파고는 대인공포증 내향인이 등장하는 [글]도 현재로 보면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눈을 감아버리는 [시골의사]는 우리 곁에 또 얼마나 많은가.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은 [성]을 읽고 있는데, 같은 생각이다. 

 

카프가는 어쩌면 예언자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낯설게 경험했던 산업화 사회에서 가족 혹은 관계의 재편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쓴 미래예언서. 

이 이야기들이 초현실적으로 읽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로 읽혀서 흥미로웠다. 

카프카에 대한 연민과 동지애가 느껴졌다. 

저 멀리 철학자의 모드였던 카프카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이 생긴다. 

 

그의 이야기속에서는 죄가 없는 주인공이 죄의식을 가지고,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혹은 체포되고, 갇히고, 소외당한다. 

그것에 대해 저항하기 보다 반성과 인정 속에 죽거나 사라지거나 사그라든다. 

 

이런 카프카의 절절한 이야기들이 공감되어 웃음이 난 건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웃기는 설정이라 웃음이 난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보니, 공감이지 않았을까 한다.

가끔은 공감을 얻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니까. 

 

하지만 며칠째 카프카를 붙들고 있었더니, 기분이 꿀꿀하다. 

민낯은 언제나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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