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유튜브로 티비프로그램 한 편을 몰입해서 봤다.
스물 한 두살에 만나 임신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 결혼한지 4년만에 이혼을 한 유튜버들을 보았는데,
X여자는 패널로 나와 X남자가 새로운 여자를 만나 자신의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슬픔이 아닌 묘한 기분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와는 다른 사람이고, 다른 톤으로 말한다고 신기해 하기도 했다.
함께 한 패널들이 상대적이라고 했다.
X 남자는 새로운 여자와 5년을 만났는데 대화가 늘 끊이지 않는다고, 대화를 하면서 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실제로 그 둘의 대화는 편안했고, 시선은 서로에게 잘 머물러 있었다.
구독하고 있는 유튜버들 중에 휘토피아도 그의 미국인 남편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구독한 지 3년쯤 된 것 같은데 그들은 점점 더 닮아가고, 닮아가는 것만큼 각자는 더 유연해지는 것을 구독자로서 느끼게 된다.
X여자와 X남자커플, 그리고 휘토피아는 이십대 후반, 삼심대 초반들이다.
남녀사이의 말, 대화란 대부분 목적이나 결론을 정해놓고 나누지 않는다.
사적인 삶과 일상 속에서 말이 대화로 이어지고, 대화가 일상의 전체가 되기도 하고, 일부가
어쩌면 부모자식 사이보다 더, 사적이라 남녀 사이에 말이란 각 사람마다 톤도 색깔도 제각각이다.
패널의 말처럼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할 말이 너무 많아 수다쟁이가 되는데, 누군가에게는 내향인이 된다.
성격이라는 것이 달라지는 거지.
그래서 그런지 나도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이 나를 이야기할 때
어떤 이는 내성적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외향적이라고 한다.
그때는 왜 사람들마다 나를 이렇게 다르게 이야기할까? 좀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대하게 되는 내가 이중인간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자책 같은 것도 했던 것 같다.
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이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대하지 못했을까?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인데, 그 때는 왜 그런 걸 하지 않았던 걸까?
내가 좋은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몰입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특히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거다.
어제 그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그때 나의 혼란스러웠던 시간이 떠올랐다.
나는 왜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이성간의 만남에서 특히 그렇다.
누군가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나도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지만 할 말이 없을 때가 많았다.
호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생각해봐야겠지만,
분명 호감은 느꼈지만 할 말이 없어 듣고만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들이 속 좁은 내 안에서 바글바글거리고
결국 마음은,
어느 날 내 안에 가득찬 말들의 밀도를 이기지 못하고 사르르 꺼지고야 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라는 것.
X남자와 X여자와 이야기할 때를 기억한다.
그 둘은 방송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더랬다.
가끔 먼데를 바라보기도 했고,
X남자가 새로운 여자와 이야기할 때는 흔히 말하는 눈으로도 말하고 입으로도 말했다.
새로운 여자라지만 이들도 X여자와 만났던 시간만큼을 보낸 사람들인데도 말이지.
누군가가 나빴던 것이 아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상대적인 것이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해 이르렀던 참사들을 경험한 사람은
혼자서 그에게 할 말을 연습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그에 대한 호감을 지우고, 마음 닫고, 둘 사이에 켜져 있던 촛불을 조심스럽게 끈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하지 못해서.
우리는 헤어진다.
'관계와 걸음 — 조심스러움과 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귀향 (0) | 2026.03.02 |
|---|---|
| 환한 시간 (0) | 2026.03.01 |
| 진주목걸이 (0) | 2026.02.28 |
| 고요하다 (0) | 2026.02.28 |
| 나는 친구를 선택했다 (0) | 2026.02.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