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엔 카뮈를 읽었다.
요즘 놀라는 건, 오래 전 읽었던 기억 속에 카뮈와 지금 읽는 카뮈의 방점이 다른 곳에 찍혔다.
<이방인> 의 첫 문장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그는 슬프지도, 어쩌지 하는 걱정도 없이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과 곱씹는 것은 언제였을까 정도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부모의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다.
엄마의 죽음 자체만 그에게 남는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살인에 관한 그의 대답인,
'나는 그것이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뫼르소는 왜 죽였을까? 고민했고, 고민의 결과가 태양이었다.
사실이고, 공감되었다.
엄마의 죽음, 지독하게 더운 날씨, 뜨거운 햇빛, 장례식,
그리고 그는 승진도, 결혼도, 심지어 엄마의 죽음까지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태양이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마지막 문장. 정신승리라고 할까?
죽음 혹은 사형이라는 운명을 의지로 받아들이는 것.
그는 의지라고는 없었던 사람인데, 사형을 선고 받고, 감방의 벽을 보며 면벽수도하듯 삶의 진실을 발견한다.
모두가 죽는다.
그리고 사제와의 설전으로 본인 합리화를 완결해 나간다.
사형은 면하지 못하지만 뫼르소는 사형을 대하는 태도를 바꿈으로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반항을 한다.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행복한 마음으로 사형을 받아들임으로서
타인의 재판이나 신의 재판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복과 불행을 선택한 독립적인 인간임을 선언했다.
그는 이제 사형을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 내가 받아들이는 마지막 사건'으로 재정의한다.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재판이 끝나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동안의 뫼르소에게는 공감이 되지 않아 한 문장씩 애를 써가면서 읽었다.
<페스트>를 읽으면서 뫼로스의 마지막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뫼르소라기 보다는 카뮈의 생각이겠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충격적인 문장,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이 문장까지, 퍼즐을 맞추듯 카뮈의 생각을 쫓아갔다. 아직도 저 멀리 있긴 하지만.
어차피 죽어야 할텐데, 사는 것은 괴로움으로 가득찼는데, 차라리 자살을 하면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있는데, 왜 살아야지?
이 생각은 나도 한 적이 있었다. 삶을 살아갈수록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지금도 한다. 죄를 지어 죽은 뒤 지옥에 갈거라면 차라리 삶을 그만두면 죄 짓는 것을 멈추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릴 때부터 카톨릭이었던 나는 미사때마다 하는 고백기도,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로 시작해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라고 하며 가슴을 세번쳤다. 나는 어릴 때부터 죄인이었다. 심지어 원죄까지 있는 죄인이었다.
그리고 2주마다 죄를 고백하는 고백성사를 봤다.
죄를 사함을 느끼기보다는 죄가 쌓여가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카뮈가 말한 부조리였을까?
<페스트>를 읽으면서 <이방인>을 읽으면 답답했던 마음이 좀 가라앉기는 했다.
혼자만의 반항이 아니라 연대여서 그럴까 싶다.
뫼르소의 재판보다 더 황당하고, 더 큰 전염병 페스트임에도 나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타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해볼만한 일이었다.
주인공은 의사 리유보다 타루가 내 마음 속의 주인공 같다.
어쩌면 뫼르소의 다음 생 같았다.
타루는 판사인 아버지의 사형선고를 보고, 사회적 사형 제도에 환멸을 느낀다.
그는 그런 사회에 속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살아가지만, 페스트라는 대재앙 앞에서는 보건대를 조직해 가장 앞장서서 싸운다.
타루는 종교 없이 '성자'가 되고 싶어했다.
페스트가 끝자락에 그는 결국 페스트로 죽었다. 그의 삶과 죽음은 가치와 의미가 있었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세상은 부조리하니 내면의 평화를 통해 얻은 개인의 정신승리,
<페스트>의 리유나 페루는 세상은 부조리하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을 위해 헌신하며 서로를 돕고 연대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회적 실천이었다.
신에게 의탁해 태어나기도 전에 얻은 원죄의 죄사함을 구하고, 매일 쌓이는 죄의 고백와 죄사함을 구하는 것보다는
시지프가 어차피 내려올 바위, 그렇다면 굴려올리지 않아도 될 바위를 '스스로의 의지'로 바위를 굴려올리는 매일의 도전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것이라고,
카뮈는 이 세 권의 책을 통해 말하는 거였다.
카뮈가 말하는 인간이 되는 거, 너무 힘이 든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당연히 아니고,
카프카는 부조리를 겪으면 그것을 자작하면서 끝없이 맴돌거나 죽음 택했다.
카뮈는 인간의 의지와 반항을 택했다.
카뮈는 49세에 준비되지 않은 죽음 맞았다. <이방인>에서 <페스트>로 생각이 나아간 것 같은데, 그가 좀 더 살았다면 그의 생각, 철학은 어떻게 나아가거나 변했을까?인간의 강한 의지, 반항과 같은 내게는 좀 힘겨운 도전의 단어가 아니라이해와 사랑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았을까?카뮈가 일생동안 그의 어머니를 연민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권의 책을 읽으면서 카뮈는 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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