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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서정춘] 竹篇.1 - 여행

by 발비(發飛) 2006. 9. 26.
竹篇.1  -  여행

서정춘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거기에서도 멀리
여기에서도 멀리
세상과 나를 멀게 만들어버린 너를 뭉개버릴거야.

짐의 무게를 피해 겉표지도 없이 가져간 대학노트 일기장에서 너를 옮긴다.
몇 개의 볼펜 잉크를 다 먹어버린 일기를 자판에다 두드린다.
삐뚤거리는 글자, 잉크물 얼룩진 글자들이 말끔하게 모니터에 뜬다.
반듯해지는 너를 놓을 수 없다.
넌 커져간다.
커진 너 안에서 난 한 귀퉁이가 된다.

여기에서 멀리
거기에서도 멀리
사방에서 멀어진다. 너때문에

너가 사라질 때까지 너를 쪼물락거린다.
장미꽃이더라도 사파이어더라도 말똥거리며 죽어도 살아있는 너의 형체가 사라질때까지.
내게 묻은 너, 너에게 묻은 나
너와 내가 사라질 때까지 쪼물락거려줄 것이다.

다시는 너가 내게 보이지 않을때까지.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모두 멀다.
오고 갔던 그 길들이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디에서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푸른 기차를 타고 100년동안이나 가야한다는 하얀대꽃 피는 마을,

꿈꾸지 않기 위해 나의 여행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 여행이라는 이름을 가진
너를 뿌리채 뽑아내어 퇴비무덤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

푹푹 ㅤㅆㅓㄲ도록.

푸른 기차를 타고 100년 동안이나 가야한다는 하얀대꽃 피는 마을이 좀 가까워지지 않을까.
내 안에 하얀 대꽃이 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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