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즈음, 성신여대 앞에 있는 한 병원에 갔었지.
요즘 내가 다닐 수 있는 재산인 다리에 좀 문제가 있는 듯 하여,
긴 여행을 가기 전 점검하러 갔었던거지.
다리를 초음파를 보면서 동맥과 정맥의 혈류를 보는...그런 검사였었다.
문제는 막 초음파를 보려고 하는 순간,
병원은 갑자기 어둠!
저녁시간에 병원에 들른 것이라... 세상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의사선생님, 간호사님 어찌 할 바 몰라하시더니,
곧 다시 전기가 들어올 수 있으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별일 없으니,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간호사님이 내가 있던 검사실에 같이 있게 되었다.
미안한지 계속 뭐라고 말을 건다.
그리고 나도 말을 한다.
어둠이라는 것, 참 좋더라.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되니까...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실루엣만 두고 마주한다.
"죄송합니다. 병원을 개원한지 1년이 넘었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네요. 좀만 기다려보세요."
"아니예요. 재미있네요. 병원에서 정전이라... 아마 살아가는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요."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일대가 다 정전이 되어서인지, 밖에는 호루라기 소리가 야단이고. 건물안에서 세콤기사들이 왔다갔다 난리가 났다.
"전기가 참 고마운거네요."
의사선생님은 참 썰렁한 농담을 한마디하고는 또 사라졌다.
간호사는 다리 이야기를 한다.
언제부터 다리가 아팠냐는 둥, 이 병원은 어찌 알았냐는 둥,
그럼서 자연스럽게 제주도 갔다온 이야기를 했다.
섬들이야기, 오름이야기, 제주도 떡뽁이 이야기....
"마라도 못 가봤는데.. 가파도도 못 가봤는데, 비양도도 못 가봤는데..."
간호사님이 그렇게 말하면서, 고향이 제주도란다.
제주에서 살던 이야기를 한다.
나와 간호사님은 처음 만나 어둠 속에서 제주도 이야기를 한참했다.
그리고, 제주도 사람들이야기, 서울 사람들이야기
어둠 속에서는 목소리가 작게 나온다.
빛은 소리를 먹었었나보다.
어둠속에서 소리는 무지 확대되어 들린다.
둘이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내내,
만약 이병원이 무지 작은 공간이고, 할 수 없이 어둠 속에서 지금 현재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면,(영화에서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솔직한 이야기를 할까? 아님 포장된 이야기를 할까?
순간, 그런 절대절명의 상황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 우린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런지...
아로마촛불이 왔다.
어둠에서 좀은 벗어났다.
촛불에 비쳐진 진료실에 있는 물건들이 참 선명하다.
빛 속에서는 하얗기만했던 진료실에 꽃그림 액자가 가장 선명하게 보였다.
세 개의 액자가 나란히 붙어있었는데. 커다란 꽃 하나가 세개의 액자를 걸쳐서 피어있었다.
마치 싱싱하게 살아있는 듯 보였다.
내가 앉은 뒤로 걸린 시계는 똑딱 똑딱 잘도 간다.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 것이구나.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다리가 아픈거구나.
40분쯤 그런 시간을 보낸 뒤 전기가 들어왔다.
5분쯤은 눈이 부셔 머뭇 머뭇!
하지만 사실,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민망해서였다.
방금까지 뭐라고 뭐라고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던 사람은 다시 낯선 사람이 되었고,
장미꽃은 싱싱함을 잃어버렸다.
내 뒤에 있던 시계소리는 빛이 옴과 동시에 가버려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처음 병원을 들어섰을 때의 어색함보다 더 어색한 얼굴을 하고 진료를 받았다.
어둠을 걷어내자 했던가
빛속에서 살자 했던가
내가 느낀 어둠과 빛!
.
.
.
오늘 경남 합천 황매산으로 무박산행을 간다.
어둠 속에서 다시 놓여질 것이다.
어둠을 다시 만나보면 물어볼 것이다.
빛과 어둠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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