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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회사를 그만두면서

by 발비(發飛) 2006. 3. 3.

이제 몇 시간 뒤면

한동안 내가 "어디에 다닙니다." 라고 말했던 회사를 떠난다.

 

무지막지한 갈등의 시간.

두려움의 시간.

불안한 시간들은 불안한 말들을 쏟아 놓을 것이고

불안한 말들은 나에게 다시 불안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덮어두고 푹푹 삭힌다.

 

이제 그 복잡한 시간이 끝이 났다.

블로그를 닫으면서 걸어두었던 달리의 "시간의 영속"이 다시 생각난다.

 

몇 달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지만,

막상 카운트다운이 들어간 시간들을 보내는 것은 별로다.

그것이 새로운 일이라던가, 희망찬 미래가 계획된 것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처럼 어찌 살아질런지 살아갈런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태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무모한 것이 분명하지만,

언제 무모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항상 무모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그 걱정을 뚫고 나가는 것은 맞바람이 치는 바닷가를 걷는 것과 같다.

발이 나아가려해도 몸은 뒤로 젖혀지고, 머리는 좌우로 흔들거린다.

분명 가려는 방향이 있는대도 마구 흔들리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은 나에겐 바람이며,

혹 그 바람이 미는데로 밀려간다면 그것이 운명이고 소위 말하는 팔자일 수도 있다.

그 바람.

그 바람.

한 발자국을 떼기가 힘들만큼 바람은 거세지만,

맞바람이 치는 바닷가에서 바람을 따라간다는 것은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난 한 발자국을 내딛는데 무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한 힘이 들겠지만,

힘이 든 것에 비해 겨우 한 발자국일테지만,

그렇지만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나갔다고 생각하겠다.

 

 

 

 

-잠시 딴 소리-

 

고백할 것이 있다.

난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오늘까지.

 

난 처음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 파지 읽기에 빠져있었다.

출판사에서 신간이 들어오면 신간위에 얹혀있는 파지들을 짬짬이 읽는 것은 

나에겐 기쁨이었다.

마치 무슨 봉사활동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멀쩡한 종이, 혹은 멋진 종이에 폰트 이쁘게 인쇄된 활자.

그런데도 책이 되지 못한 파지들.

그 불쌍한 파지들을 읽으면서 내가 그들의 못다한 꿈을 이루어 주는 듯한 맘이었다.

 

어느날은 4도인쇄에 스타라이트지같은 펄이 예쁘게 들어간 잡지광고

어느 날은 미모조 60정도의 얇은 종이에 찬송가

어느 날은 아이들의 자습서

 

 앞과 뒤가 없는 그런 파지들을 읽으면서 앞 뒤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내가 다 둘러볼 수 없는 세상을 보기도 하고

 

그래서 난 생각했다.

제본소에서 일하는 여자라면 더 많은 파지를 볼 수 있을텐데....

그래서 난 이 블로그를 만들면서 이 곳에서만은 제본소의 여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제본에 관계된 글들을 읽으면서 제본소여자인 척 주절거렸다.

 

블로그 처음의 나의 이야기는 제본소였다.

하지만,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상이나 책으로 익혀지는 것은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제본소이야기가 빠지고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제본소에 다니는 줄 알고 댓글 달아주셨던 분들께 참 많이 미안했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

 

아무튼 잠시 딴 소리는 오늘 까지 다니던 곳이 출판사라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딴 소리 끝-

 

 

처음 출판사를 다니기 시작할 때도 지금과 같았다.

출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도대체 언어소통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난 출판에 대한 언어 소통이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무슨 말들이 오고가는 줄 알게 되었다.

 

알게 된 때 난 그만 두었다.

다시 출판사에 일을 하게 될 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른다.

좀만 쉬고...

아주 좀만 쉬고...

 

뭘 하는지도 모르고 마구 뛰던 발을 멈추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원래 무엇을 하려고 뛰기 시작했던 것인지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무조건 뛰느라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을 기념한다.

마침표.

그리고 한 줄 행을 띄우고

한 칸 들여쓰고

그리고 좀 굵은 체로 첫 글자를 찍는 오늘을 기념한다.

 

아직도 이 주절거림을 공개로 할 것인지 비공개로 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인 것 같은데,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이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나의 벗들이

몇 줄기의 바람으로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불어주기를 바란다.

 

인수인계 서류의 프린트가 끝이 났다.

이면지가 아닌 새 종이에다 프린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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