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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기형도] 도로시를 위하여 D-9

by 발비(發飛) 2005. 12. 23.

도로시를 위하여

 

-유년에게 쓴 편지. 1

 

기형도

 

1

도로시, 그리운 이름. 그립기에 먼 이름. 도로시.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다. 그 얕은 언덕과 어두운 헛간, 비가 내리던 방죽에서 우리가 함께 뛰어놀던 그리운 유년들. 네 빠른 발과 억센 손은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들을 제치고 언제나 너를 골목대장으로 만들어주었지. 우리는 아무도 여자애 밑에서 졸병노릇 하는 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위험을 무릅쓰고 꺾어온 산나리꽃 덕분에 네가 내게 달아준 별 두 개의 계급장도 잊을 수 없다. 모두가 네 명령 밑에서는 즐겁고 가벼웠다,. 네가 혼혈소녀였던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용감한 도로시. 네가 떠나자 우리는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서로 번갈아가며 대장 노릇도 해봤지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도로시.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다시 재밌는 전쟁놀이를 시작했는지 알고 있니? 우리는 마치 네가 우리와 함께 놀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철길 위를 뛰어다녔다. 네가 명령을 내렸다. 도로시.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너의 명령을 알아차렸다.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어 있는 대장의 자리에서 늘 웃고 있었다. 언제이던가 나는 네가 늘 앉아 있던 자리에 남몰래 찐빵을 갖다 놓은 적도 있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네가 없어도 너와 함께 즐겁게 놀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너에 대한 우리의 짧은 사랑 때문이었겠지.

 

2.

도로시. 먼 이름. 멀기에 그리운 이름. 도로시

너는 그 머나먼 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딱 한 번 우리 마을에 들렀었다. 가엾은 도로시. 너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벌써 네가 필요없었다. 너는 주근깨투성이, 붉은 머리의 말라깽이 소녀에 불과했다, 왜 그날도 이슬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그날 마을어귀에서 네가 보여준 그 표정, 도로시. 그것은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대장으로서 보여줄 수 있었던 마지막 비웃음이었을까. 그 후 우리는 재빨리 나이가 먹었고 쉽게 너를 잊었다. 도로시. 그러나 절대로 우리가 버릴 수 없는 도로시. 그리운 이름.

 

 

나의 도로시.

이젠 보내야 할 도로시다.

오늘은 D-9, 이제는 나도 시인처럼 나의 도로시를 보내야 한다.

도로시.

나에게 도로시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본다.

나의 도로시?

나의 도로시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나의 도로시이다.

나 자신이라고 믿었던 나의 도로시.

도로시는 언제나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고 믿었던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제 나의 도로시가 그의 시처럼 변한 것이다.

나의 도로시는 이제 내가 믿었던 내가 믿고 싶었던 그 모습이 아니라,

주근깨 투성이의 말라깽이인 것이다.

지금 현재의 도로시가 비록 그럴 지라도.

난 나의 도로시를 사랑한다.

적어도 내가 믿었던 나라는 도로시는 나의 주인이었으며, 나였으니까..... 세상의 주체였으니까.

난 그런 도로시를 이제 보내려한다.

2005년 이제 9일이 남은 날,

어느 이웃에 갔다가 기형도님의 '도로시'를 만나고,,,, 나의 도로시를 만났다.

나도 언젠가는 나의 도로시를 잊어버리겠지.

나의 도로시는 어딘가에서 주인으로 살겠지.

난 나의 도로시를 잊고 가끔 아주 가끔 그저 나에게 도로시가 있었지 하며 생각하겠지.

오늘 아침.

난 나의 도로시를 맘껏 추억해본다.

그리워해본다.

동네대장이었던, 세상의 대장이었던, 나의 주인이었던 나의 도로시를 추억해본다.

그리고 보내야겠다.

멀리 떠나 있는 누구처럼, 아주 가끔씩 도로시를 보고 싶겠지.

그때 나의 도로시에게 안부정도만 묻기로 하자.

그러기로 한다.

 

안녕!

나의 도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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