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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이윤학] 뿌리 외1

by 발비(發飛) 2005. 11. 7.

뿌리

 

이윤학

 

신문지에 싸인 장미 한 다발

전지 당한 장미 한 다발

고무줄로 묶인 장미 한 다발

 

피었다 시들 장미 한 다발

 

마음은

수백 번 잘려도

다시 자라는 잔가지

 

누가 시들 때까지 지켜볼까

 

누구의 뿌리를 가질 수 있을까

 

시인은 힘이 없나보다.

 

참 이쁜 꽃,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많이 널려있는, 사방이 장미로 쫙 깔려있다.

장미가 상징하는 사랑이라는 말과 닮았다.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셋트처럼 어울리더니, 서로가 닮아버렸다.

 

사랑도 흔하고 장미도 흔하고.

사랑도 많고, 장미도 많다.

사랑도 여기저기서 잘려 나가고, 장미도 잘려 나간다.

끝날 것을 아는 사랑을 시작하고, 잘려질 것을 알면서도 장미는 피었다.

서로가 닮아버렸다. 어느새...... 닮아버렸다.

 

사랑과 장미.

그 사랑과 장미는 잘려나감과 동시에 그것으로 생은 다하는데,

사랑을 주고 장미를 주었던 사람은

또 다른 싹을 키운다.

 

또 다른 싹을 키우며 잘려 나가지 말고 시들어서도 함께 할 이를 두리번 거리며 찾는다.

잘리지 않고 곁에 두고 서로의 뿌리가 엉켜가며 살아갈 그런 싹을 키우고 싶어한다.

싹, 그 아래로 파고 들어가 뿌리를 만나야 한다.

장미 혹은 사랑 그 흔하디 흔한 세상에서 시들어져버릴 장미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엉킬 뿌리를 찾는 것이다.

 

난 장미가 되기보다는 뿌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잘려나가지 않는 뿌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깊은 땅속에서 나를 찾아온, 내가 찾은 뿌리와 엉키고 싶은 것이다.

꽃으로 피기 보다는 이제 뿌리로 엉키고 싶은 것이다.

 

시인도 힘이 없나보다.

뿌리를 되고 싶은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떠다니는 것에 지친 사람이다.

세상을 둥둥 떠다니는 사랑보다는 뿌리고 엉키고 싶은 것이다.

꽉 붙잡고 싶은 것이다.

장미는 이미 시들어버리고, 잘려나간 장미가지 밑둥에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안간힘을 쓰며, 발을 땅에 꽂아야 한다.

뿌리가 목표다.

 

 

 

 

 

 

 

절름발이 까치

 

  날지 못하는 까치가 있었다. 덫에 치여 한쪽 다리를 못쓰게 된 까치가 있었다. 한쪽 다리로 뛰어가던 까치가 있었다. 인간들에게 잡히지 않으려 있는 힘껏 뛰어가던 까치가 있었다. 도랑이나 산기슭에 처박히던 까치가 있었다. 까치는 제트기와 같아서 활주로가 있어야 날아갈 수 있었다. 까치는 도움닫기를 해야 날아갈 수 있었다, 까치는 한쪽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까치는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날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까치는 인간들 손아귀에 들어갔다 풀려나기를 거듭했다. 까치는 잡힐 줄 뻔히 알면서 번번이 기겁하고 달아났다. 날개를 펼쳐 들고, 중심을 잡기 위해 바닥을 치면서 내달리던 까치를 보았다. 끊임없이 날개로 바닥을 치면서 내달리던 까치를 보았다. 자신을 포기할 수 없는 까치를 보았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까치를 보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까치를 보았다.

 

난 조류를 싫어한다. 싫어한다기 보다는 무서워한다.

거의 정신적 장애수준으로 무서워한다. 지금도 이 사진을 찍었을때를 기억한다.

두 손을 벌벌 떨며 사진을 찍었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찾아서 올리는 이 순간도 무섭다.

모니터를 빠져 나올 것 같아서.

아마 이 곳에 내가 두드려놓은 이윤학시인의 시는 다시 읽어보지 않을 수도 있다.

저 사진을 보는것이 무서워서...

하지만, 이 시를 읽는 순간 사진이 생각났다. 나란히 두고 함께 읽어 보고 싶었다.

 

지난 여름이었을 것이다.

경복궁을 갔었다.

 

동십자각쪽 문으로 나오려는데,  깜짝 놀랐다.

검은 비둘기 한 마리가 (생각만 해도 무서워 손끝이 지금도 저리다.) 화단턱에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는데도 그냥 저렇게 앉아있었다.

동그란 눈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다리를 다친 것이 분명하다.

 

저 비둘기, 한쪽 다리로는 어찌 할 수 없나보다.

시인의 말처럼 새도 날려면 두 발로 서서 도움닫기를 해야 하나보다.

설 수 없으니 날 수 없다.

설사 난다한들, 내릴 수도 없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던, 많은 시간 저 미련한 새대가리 비둘기는 얼마나 많이 날개를 퍼득거렸을까?

 

난 비둘기가 무서워 그냥 지나갔었다.

하지만, 벌벌 떨면서 다시 돌아갔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난 비둘기사진을 찍었다.

비둘기는 꼼짝 않고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쳐다보았었다.

 

무서워.

나보다 강한 것 천지인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것도 내가 날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눈 뜨고 마주 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내가 도움닫기 못하는 것을 알고서,나를 날리는 인간들은 얼마나 무서운가..

날개죽지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내리지도 못하고 날개짓을 해야 하는 나는 얼마나 무서운가.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나는 얼마나 무서운가.

내 머리가 박힐 것을 알면서도 추락하는 나는 얼마나 무서운가.

 

그러고도, 그러고도

또 내 날개를 접어 들고 또 날아보라고 한번 더 해보라고

나를 날리는 인간이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가.

 

다리 하나를 다친 까치고 비둘기이고 그리고......

그런 절음발이 까치, 비둘기, 그리고......

 

아마 난 이 시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내가 꿈에서 가위가 눌리는 날은 새의 꿈을 꾸는 날이다.

오늘은 절음발이 까치를 보았고, 날지 못하는 비둘기의 사진을 보았다.

 

너무 싫고 무서운데, 저 비둘기를 왜 여기에 두는거지?

 

단풍잎 장판

 

 속리산 법주사에 올라가는 길은 평지였다. 단풍잎이 깔린 길은 방이었다. 단풍잎 장판을 밟기 미안했다. 단풍잎 장판 밑에 신발을 넣고 걸어가는 여자아이를 보았다. 댕기머리를 땋아 묶은 여자아이였다 앞서가던 할머니가 여자아이를 재촉햇다. 여자아이는 발등을 보고 걸었다. 단풍잎 향기가 올라왓다. 여자아이 발밑에서 쌀 씨는소리가 들려왔다.

냇물에도 단풍잎이 깔려 있었다. 단풍잎 장판에 누워 잘 수 있다면? 오른손으로 오른쪽 불을 받치고, 누군가와 마주 보고 누워 물 흐르는 소리로 얘기할 수 있다면? 꿈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빨간 플러스틱 바가지에 쌀을 퍼와 씻고 싶었다. 고동색 슬리퍼를 신고 수돗가에 앉아 쌀을 씻고 싶었다. 뜨믈이 끈적거리도록 쌀을 씻고 싶었다.

여자아이가 신발을 끌고 걸어간 단풍잎 장판이 깔린 방을 보았다. 두더지 두 마리가 사이좋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 가을에 단풍 든 산을 걸어본 사람은 쌀 씻는 소리를 들어봤을 것이다.

그 소리 다 들어야 하는데... 시인이 쌀 씻는 소리.

아마 앞으로 가을산을 오르면 난 시인이 말한 쌀 씻는 소리를 항상 기억하고 떠올릴 것이다.

쌀 씻는 소리... 그렇게 들을 수 있는 시인의 감성, 부럽다.

참 좋다.

쌀 씻는 소리....그 소리, 낙엽밟는 소리.

 

시인.

시인이라는 부류의 사람.

그가 만들어놓은 집, 시집?

 

시인이 만들어놓은 시때문에 무서움에 떨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간 시집에서 시인은 날 잠재운다.

조용히 쌀 씻는 소리로 자장가를  대신해준다.

그의 외로운 소리가 토닥토닥 나를 재우기도 한다.

 

이윤학  제 5시집 [그림자를 마신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308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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