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찔끌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전라도길....
아프다. 한하운의 시를 읽으면, 같이 통곡이라도 하고 싶다.
난 힘이 들때면,
그의 시를 읽는다. 그리고 한번 울어본다.
내가 힘들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가 불쌍해서 우는 것이라면서... 그냥 너무 불쌍해서 펑펑 운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도 전라도길이다.
어차피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언제 남은 발가락이 떨어질 지도 모른채
길을 가고 있는 문둥병환자다.
어제도 난 발가락 하나가 떨어졌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난 발가락 하나를 길에다 버리고 집으로 왔다.
힘이 든다.
그러니깐 너를 버릴 것이다.
난 내 발가락을 길바닥에 던지면서 생각했다.
'난 발가락이 하나 없어.. 그러니깐 절룩거리는 것은 당연해'
늦지도 않은 밤.
그래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스치던 밤.
전철에서도 길에서도 사람들이 너무 많던 밤.
난 발가락을 하나 던져버리고 절룩거리며 집으로 왔었다.
신지도 않은 양말
초가을임에도 발가락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큰 샌들.
그 안에 발가락없는 발이 천연덕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다들 봐라.. 보이지?
난 발가락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니깐 좀 절룩거리자!"
배부른 동냥이라도 할 수 없다.
난 집으로 오자 한하운의 시집을 쭈루룩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한하운시인님! 당신의 시는 너무 슬픕니다."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
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도대체 웃음이란 얼마나
가볍게 스쳐가는 시장끼냐,
도대체 울음이란 얼마나
짖궂게 왔다가는 포만증이냐.
한때 나의 푸른 이마 밑
검은 눈썹 언저리에 매워본 덧없음을 이어
오늘 꼭 가야 할 아무데도 없는 낯선 이 길머리에
쩔룸 쩔룸 다섯 자보다 좀 더 큰 키로 나는 섰다.
어쩌면 나의 티가 끄으는 나의 그림자는
이렇게도 우득히 웬 땅을 덮는 것이냐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
얼른 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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