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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생명

by 발비(發飛) 2018. 3. 9.



아침에 어떤 이의 긴 문장 속에 '생명정치'라는 말을 보았고, 가슴 속에 맴맴 떠나지 않았다. 


생명: 생물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는 힘이다. 모든 생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속성이다. 어느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다. 때에 따라서는 생물과 그 활동을 통틀어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위키 


그리고, 

생명력이라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이다. 

우리는 생명력에 의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


그리고, 

정치와 경제는 생명 매커니즘으로 작동된다고 해도 말이 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자본주의의 생면 매커니즘에서 도태되고 배제된 이들은 망명, 난민가 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살아남는 자와 죽는 자 그리고 뇌사자가 있다. 


누군가는 


살아야 할 운명이 되고, 

죽어야 할 운명이 된다.


아침에 읽은 같은 글 속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현대 이전에 권력은 통치되는 자들을 죽이거나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현대 권력의 생명정치는 원리가 바뀌어 사람들을 살리거나 죽게 버려 둔다."

한참 보았다. 

그런 것 같았다. 


생명을 어떻게 다루는가

생명을 인식하고 있는가


이것은 정치에 반영되기도 하고, 경제에 반영되기도 하고, 철학에 반영되기도 하고, 문학에 반영되기도 하고, 역사적 평가에 반영되기도 한다. 


그제 본 영화 [셰이브 오브 워터]에서 주인공 엘라이자가 생각났다. 

이 물체 그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를 구해, 그와 함께 그의 세계인 물 속으로 들어간다. 


물리적으로는 죽음이다. 

그는 삶이고 그녀는 죽음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 어디에도 삶과 죽음이 교차되었음을 느끼지 못한다. 

관객인 나는 차라리 영생을 느꼈다. 




-잠시 딴 소리-


지난 해 돌아가신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10년 정도 불편한 몸으로 계셨다. 

6,7년 전 쯤 아버지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자신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마구 때리면서 불편하다고 화를 내셨다. 

몇 달을 시달렸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차피 당신의 딸보다 더 젊어질 수는 없는 거라고, 그걸 원하는 것은 아닐 거 아니냐고,

뒤를 보지 말고, 앞에 놓은 죽음을 보자고. 

우리는 모두,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아버지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을 것이므로, 누구나 죽을 것이므로 받아들이고, 화내지 말고 삶을 살면 어떻겠냐고, 

화만 내다가 돌아가시는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아버지는 그때 이후 오른손을 때리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누군가가 나처럼 말한다면, 아버지와 같은 상황에 놓인 나라면, 

아버지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떨지 모르겠다. 


-잠시 딴 소리 끝-



요즘 작업하고 있는 어느 작가의 소설은, 

핵폭발을 피한 잠수함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세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생존자라고 생각한다. 

삶을 위해, 

영화 마션처럼 잠수함에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마션은 혼자지만, 

이들은 여자 하나, 남자 둘이었으므로, 마지막 인류였으므로 연속성을 위해 아이를 갖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 작가는 여자가 두 남자를 번갈아가며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구한 이에게 사랑에 빠진다. 

반대로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는 인물은 나쁜 놈 역할을 한다. 


-또 잠시 딴 소리-


생명이라는 단어의 영어는 life, 별로다. 

그래서 라틴어, vita 좋다. (진화?가 덜 된 언어인 이탈리아어로도 vita)  


vita[vi:tə]

1. 삶, 생존, 목숨, 생명, 일생(一生), 인생, 정신

2. 생활양식, 사는 모양, 생활, 이력

3. 먹고 사는 것.


비타라고 말하니까, 비타민 때문인지, 라이프라고 말할 때보다 훨씬 능동적인 듯한 느낌이다. 

운명적이거나 숙명적인 것이라기 보다 훨씬 사실적인 느낌이다. 


-잠시 딴 소리 끝-





Vivamus, moriendum est    

살자!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에! 



그러고 보니, 생명을 삶과 같은 단어로 쓰는 것은 맞지 않다는 느낌이다. 

생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준으로서 서 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엘라이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질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이구나. 

그는 엘라이자를 구하러 온 지저스였네. 


엘라이자는 이 삶을 넘어 저 삶으로 갔네, 

그는 엘라이자를 이끈 부처였네. 엘라이자는 이 삶의 끝에서 드디어 해탈한거였네. 헉;



자꾸 영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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