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귀퉁이 연탄창고 앞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대추나무는 그저 그렇게 생겼기에 오고 가는 길에도 쳐다볼 일이 없었다.
앵두나무하고도, 감나무하고도, 모과나무하고도 놀았지만,
대추나무하고는 별로였다.
어린 아이들이 거의 그렇듯이 대추는 그닥 정도가 아니라 번외의 과일이었기에 쳐다볼 일이 없었던 듯.
한참 더운 날이었다.
오락가락 얌전하게 생긴 대추나무가 이상해졌다.
손가락만한 대추나뭇잎 사이로 꽃이 피긴 했는데, 꽃이 미친 듯이 핀 것이다.
잎도 보이지 않고, 가지도 보이지 않고, 대추나무가 온통 꽃으로 덮혔다.
어린 눈에도 그 모습이 징그러웠다.
꽃이 펴도 펴도 너무 핀 것이다.
엄마에게 물었다. 대추나무가 왜 저러냐고....
엄마는 모르겠다고 했고, 아버지는 지랄병이 걸린 것이라고 했다.
지랄병.
초등학교 몇 학년이 지랄병이 무엇인지 어찌 알았겠으며,
국어선생님이셨던 아버지 입에서 나온 지랄병은 욕이 아니라 병명일 것이라고 의심없이 믿었다.
잘 생각해보면,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던 대추나무였지만 해마다 제법 튼실한 대추를 많이도 열었었다.
큰 집 제사에도 가져가고, 커다란 것들은 저녁에 마치 과일처럼 베어 먹기도 했었다.
대추 보고 먹지 않으면 늙는다며, 대추는 보는 대로 무조건 하나 이상은 먹어야 한다는 협박때문이긴 했지만 말이다.
싫다 싫다하면서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먹던 대추였다.
며칠 두고 보자던 아버지는, 그 며칠 뒤 대추나무를 잘랐다.
꽃이 하도 흐드러지게 펴서 대추나무는 몇 번의 톱질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휙 넘어갔다.
지랄병이라는 말때문인지, 괜히 무서워 대추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대추나무 가지를 쳐내고 제법 굵고 곧은 가지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잘라 챙겨두셨다.
회초리를 할 거라고 하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대추나무는 아주 단단한 나무 중의 하나였다.
아마 그 가지 중의 하나는...
엄마가 헝겊을 자르고 묶어서 먼지털이를 만들었고,
지금 이 순간 기억해보니, 아직도 집에는 그것이 있는 것 같다.
대추와 대추나무는
단 며칠 사이에 내게 흐드러지게 미친 듯이 꽃을 피웠던, 그리고 잘려버린, 그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내 은연중에는 그런 생각이 있는 듯 하다.
나는 대추나무의 생김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추나무 꽃은 정확히 기억한다.
지랄병이 걸려 미친듯이 허드러지게 피어내던 그 꽃이지만, 한 송이 한 송이 꽃 아닌 것이 없었던,
작고 하얀 꽃이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일제히 피었던 그 장면은 어린 시절의 몇몇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이다.
그 후 수십년이 지나 어른이 된지 오랜 지금까지도 주위의 수많은 것들 중에
그때의 그 대추나무만큼 미친듯이 흐드러지게 뭘 해내던 것을 본 적이 없다.
난 가장 열정적인 순간을 표현하라면 우리집 연탄창고 앞에 있던 대추나무가 지랄병이 걸렸던 그 순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며칠을 그렇게 피웠다는 이유로 잘려버렸던, 그 대추나무 말이다.
미친듯이 피었다가, 딱 그 이유로 잘려버린.
왜 미친듯이 핀 것일까?
어느 해 어느 해 한 번 그런 적 없던 대추나무가!
그리고...
왜 그 대추나무는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거지?
-어느 날-
높은 가지 위에 잎이 그 새를 봤다고 할까?
땅속 깊은 곳의 뿌리가 그 물줄기와 스쳤다고 할까?
어느 날 올려다 본 하늘을 나는 새는 그냥 새가 아니었고
내 몸에 스쳐닿은 촉촉한 물줄기는 그냥 물줄기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 그런 날도 있지.
날마다 날아다니던 새를 봐도,
날마다 뿌리를 스치던 물길에도,
제어되지 않는 촉수들이 꽃으로 피는 날이 있지.
그래, 그런 날도 있지.
아무 날이 아닌 날에 생이 바뀌기도 하는거지.
영원 같았던, 날짜도 없는 그 날에
수만송이 꽃속에 생이 바뀐거지.
(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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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대추나무 지랄병 걸린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강신장 원장이 쓴 [감성의 끝에 서라]의 목차를 보다가
일체화를 하라 - 대추 한 알과의 만남
대추 안에서 초승달을 보는 시인의 눈
이라는 목차를 보자 바로 그 대추나무가 생각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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