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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림

'증정' 때문에 군자가 하고 싶어졌어!

by 발비(發飛) 2013. 7. 10.

 

 

어젯밤 10시 즈음,

(난 그때 현관방충망설치. 베란다, 창문 방충망 보수로 늦은 밤임에도 살짝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 이 블로그의 오래전을 본 사람들은 알런지도 모르지만..., 아버진 뇌를 다치셨다.

오랜 시간 엄청난 재활훈련 덕분으로 재활에 성공하셨다.

뇌출혈로 쓰러지셨을 때 병문안을 오셨던 분들, 그 사이 엄청 많이 세상을 떠나셨다.

아무튼 아버지는 엄청난 멘탈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말씀 하셨다.

"내가 바보가 된 건가 보다. 입구가 있고, 입구가 있고, 그런데 임금왕은 아닌데.. 그게 생각이 안난다.

그게 머로?"

(또 시작이다. 아버지의 기억 더듬기. 아버진 엄청 학구적이고 지적이셨다. 그게 나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뇌의 일부를 다치시고도, 학습을 멈추지 않으신다. 그래서 매번 난관이다.

학습되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시지 못한다. 돌겠다.)

 

내가 대답했다.

"어디에 나오는 건데요?"

 

아버지 왈 " 증정"

 

그래서 가늠했다. 얼핏 생각하니 증정의 '정'이 그렇게 생긴 듯 하다.

 

"저도 몰라요."

"니는 한문과 나왔잖아."

"다 잊었어요. 그냥 한글로 쓰세요. 이 밤에 증정을 왜 한자로 써야하는데요?"

"한자를 잊어버렸다고, 됐다! 알았다!"

 

전화는 끊어졌다.

 

화가 났다. 늦은밤인데, 방충망을 단다고 드릴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고,

옆집에서 항의를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데, 아버지도 화가 났고, 나도 화가 났다.

 

(나는 나의 건망증, 주의 친구들의 기억력 감퇴에서 대해 서로 이해해주기로 결의를 했다.

얼마전 모 신문사 문화부 기자랑 밥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글을 참 잘 쓰는 기자이다.

나는 그분의 기사를 좋아한다. 사적 필이 충만한 그의 글은 기자의 글, 기사임에도 몰입, 공감이 된다.

그런 그가 고백한다. 미치겠다며, 단어가 생각이 안난다며, 기사를 쓰려면 단어의 선택이 생명인데, 단어가 생각이 안나니 이를 어쩌면 좋냐고 그런다. 옆 자리 기자와 이 고민으로 깊은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단다. 나도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40대 이후에 기억력에 대해서는 불가항력이므로, 나의 주위 몇 사람과는 기억력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잘못된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서로 정황으로 이해해 주기로 결의한 바도 있다.)

 

아주 오랜만에 온 전화였는데, 딸이라고는...

그런데,

증정? 정말 생각이 안났다. 어렴풋이 레이아웃만 실루엣으로 떠오를 뿐 획이 생각나지 않는다.

 

(방충망 아저씨가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네이버 사전으로 '증정'을 찾았다.

증정 (贈呈)

그렇구나, 입 구, 임금 왕은 아닌데, 생각나지 않은 것이 저 '임' 이었구나.

아버지는 임금 왕, 북 임이 다른데... 하고 고민하신거다.

 

이런;

 

나는 갤노트 s펜으로 '증정'을 한자로 크게 썼다.

그리고 문자메시지 첨부로 보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라고 했고, 아버지는 확인하신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건데, 이게 뭐... 생각이 안나서..."

 

화를 내신 것이 미안하신지,

아님 정성스럽게 써서 보내드린 '증정'에 감동 받으신 건지,

아무튼 아버지는 엄청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어 

"고맙다!" 그러신다.

 

(방충망 아저씨가 작업을 끝내시고 돌아가셨는데,

안전핀이 이상하게 달려서 안전핀을 걸어 둔 상태에서는 현관방충망을 열지 못하게 되었다.

문을 활짝 열고서야 현관방충망을 열 수 있다니... 이런; 아버지때문이야!

정신이 없어서 살피지를 못했잖아! 아버지 때문이야!

다시 손 봐달라고 전화해야겠다.)

 

온 몸에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서서히 삭혀야겠다.

자연스러운, 아는 것으로 그것을 까먹는 것으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겠다.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논어 중에서

('증정'때문에 한자들이 머릿속에 출몰한다. 이제는 쓰지 못하고 그저 가늠만, 다시 보니 반갑기는 하다)

 

아버지 참 괜찮은 삶을 사셨지만, 알아야한다는 강박이 여전히 몸에 배여 있으시구나.

'증정'이라는 단어따위는 필요하지 않는 세상에 나를 폭삭 담궈야겠다.

아버지도 그랬으면 좋겠다. 증정이라는 단어는 생각하지 않았음 좋겠다.

이런..., 젊은 시절, 아버지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것을 이제 딸인 내가 '강박'이라고 정의를 하네.  

무엇이든, 배워야하고, 기억해야 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셨으면 좋겠다.

 

잠자리에 누워서 이것저것 가늠을 해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에도 버티는 힘이 필요한 것이라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무지하게 힘이 든다는 사실을, 군자는 '安貧樂道' '樂山樂水' 라더니, 그래서 군자구나.

 

군자는 말이지...

 

人不知而不慍,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군자는 자신의 무능함을 근심하지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君子先行其言而後從之 말보다 앞서 행동을 하고 그 다음에 그에 따라 말을 한다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말에 대해서는 모자라는 듯이 하려하고 행동에 대해서는 민첩하려고 해야 하고
君子恥其言而過其行 그의 말이 행동을 넘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이룩하려고 해주고 남의 나쁜 점은 이루어 주지 않지만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君子憂道不憂貧 군자는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

 

 

나! 군자할래! 군자하고싶어!

나! '증정' 때문에 군자가 하고 싶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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