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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대로 小說

[존 치버]다섯시 사십팔분

by 발비(發飛) 2009. 8. 14.

다섯시 사십팔분 중에서

 

존 치버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나서는 순간, 블레이크는 그녀를 보았다. 대부분이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들인 몇몇 사람들이 로비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그들 속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혐오감과 결의가 서려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공식적으로 아무 볼일도 없었고 서로에게 할 이야기도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로비 끝에 있는 유리문쪽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초라해 보이거나 병들었거나 혹은 다른 어떤 식으로든 비참해 보이는 옛 친구나 동창을 못 본 척하고 지나칠 때 겪는 애매한 죄의식과 당혹감을 느끼면서. 웨스턴 유니언 사무실에 걸린 시계는 다섯시 십팔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급행열차를 타려면 탈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회전문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그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는 비 때문에 거리의 소음이 얼마나 더 크게 들리는지를 알아차렸다. 밖으로 나오자 그는 매디슨 가를 향해 동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교통은 꽉 막혀 있었고 저만치 앞쪽 간선도로에서는 차들이 요란하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보도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그녀가 퇴근 시간에 사무실 건물을 빠져나오는 그를 흘끗 쳐다보는 것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를 따라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도시의 길거리를 걸을 때 여간해서는 돌아서거나 뒤를 돌아다보지 않는다. 그런 습관이 블레이크를 붙들었다. 그는 비오는 날의 퇴근 무렵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세계로부터 그녀의 발소리를 구별해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걸어가면서-어리석게도- 한 일분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자기 앞쪽 길 건너편으로 연이어 늘어선 빌딩들의 벽에 가라진 틈이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가 헐렸고 다른 무엇인가가 새로 올려지고 있었지만 그 철제 구조물은 보도의 방책보다 약간 더 올라가 있어서 그 틈새로 햇빛이 쏟아져 나왔다. 블레이크는 길 이쪽 맞은 편에 멈춰서서 어느 상점의 쇼윈도우를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장식가 아니면 경매인의 쇼윈도였다. 그 쇼윈도는 마치 거기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친구들을 맞기도 하는 방처럼 꾸며져 있었다. 커피테이블에는 컵들과 잡지책들이 놓여 있었고 꽃병에는 꽃들이 꽂혀 있었지만 꽃은 발라 비틀어졌고 컵은 비었고 손님들은 오지 않았다. 블레이크는 판유리에 또렷하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뒤로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도 가까이 있어서 기겁할 정도였다. 그녀는 겨우 한두발짝 뒤에 서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알은체 하는 대신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일그러진 모습으로부터 몸을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를 해치려는지도 몰랐다. 그를 죽일 마음을 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갑작스럽게 돌아선 탓에 쓰고 있던 모자챙에서 빗물이 조금 떨어져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몹시 긴장했을 때의 식은 땀처럼 오싹했다. 차가운 물이 그의 얼굴과 맨손에 떨어졌고, 젖은 배수구들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불쾌한 냄새와 자기의 발이 젖기 시작해서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의식- 빗속을 걸을 때면 누구나 다 느끼는 불쾌감- 이 그를 뒤쫓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고조시켜 그 자신의 체력이 형편없고 그래서 쉽게 상해를 입을 수 있다는 섬뜩한 인식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그의 앞쪽으로 불빛이 더욱 더 밝은 매디슨 가 모퉁이가 보였다. 그는 만일 자기가 매디슨 가에 이를 수 있다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퉁이에 출입구가 두 곳에 있는 제과점이 하나 있었고 그는 간선도로쪽으로 나 있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가 매디슨 가를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가 신문 가판대 옆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화웹진 나비에 소개된 존 치버의 단편 다섯시 사십팔분 중의 어떤 부분이다.

 

공식적으로 서로가 헤어지기를 합의한 사이이다.

그런데도 여자는 남자의 곁을 맴돈다.

남자는 여자를 의식하며 움직인다.

그 뿐만 아니라 남자는 여자의 발자국소리까지 가늠하는 지경이다.

합의한 것과는 상관없이 남자는 여자에게서 위험을 느낀다.

끊임없이...

의식되고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인연이라는 것을 만들고

만들어진 인연을 끊기도 한다.

그런데 알게 되었다.

관계는 끊어져도 인연은 끊어지지 않음을...

관계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神'이 개입되었음을...

신은 인간으로서는 이기지도 감당하지도 못하는 힘을 가졌으면서

흐뭇한 미소로 두 팔을 벌리고 내 안으로 오면 살려준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그 불가항력을 단숨에 끊어주겠다는 듯 웃음을 날리고 있다.

 

인간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광장에서 들어가 각자의 방에 들어앉아 작은 창으로 광장을 내다보게 되는 이유이다.

어느날 광장이 텅비고서야 신은 인간에게 가혹했음을 인정할까...

그때까지 버텨야 할까...

 

 

아님 지금,

항복할까? 그래서 인간임을 잊고 눈알을 뒤집고 할렐루야를 외칠까?

 

이 이야기가 실린 '존 치버'의 단편소설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을 주문하였다.

앞뒤이야기를 읽어봐야겠다.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뒤없는 이야기의 어느 한부분을 옮겨놓으며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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