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길을 따라
장 이 지
분명히 꿈의 장난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나는 하룻밤에 세 계절을 경험했고
또 다른 세사람의 나를 만난 것이다
벽난로의 붉은 불꽃을 보고 있었을 때
세상은 온통 눈보라 속이었다
자작나무 길은 숲 속으로 아득히 뻗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한 소년이 도착했다
소년은 차가운 얼굴을
내 가슴께에 묻고 한참을 울었다
바둑이가 죽었다고 끝내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뜨거운 코코아를 소년에게 대접했다
소년은 벽난로 앞에서 잠들었다
불꽃의 춤이 소년의 흰 뺨 위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어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청년은 검은 박쥐우산을 쓰고
자작나무 길을 따라 왔다
비가 너무 오는군, 그는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되었다
나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조금 전의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잊을 수 없는 것들을
조용히 나무 탁자 위에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받은 종양 제거 수술
병실의 외로움, 반목했던 사람들,
이제는 멀어진 한 사람에 대한 기억들,
사랑과 미움, 직장들과 인터넷,
길의 무한선율, 물의 얼굴을 한 스승과의 만남
야콥슨의 전환사, 거울 속의 라캉, 시의 편린들,
아스피린 혹은 광기, 선풍기 소리,
모든 것이 꿈만 같이 여겨졌다
너무 적막했다
이제 나 혼자이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으리라 했다
빗소리만 지루하게 이어졌다
세번째 손님이 자작나무 길을 따라 온 것은
새벽녘이었다 하늘엔 아직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무어라고 했는지는 기억할 수 없다
돌아갈 시간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달을 등에 지고 있었다
그에게선 낙엽 냄새가 났다
나는 그가 나였다고 짐작한다
먼 훗날 내가 다시 이 산장으로 올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가슴에 품어줄 것이고
뜨거운 코코아를 대접해줄 것이다
내가 그일로 위로를 받듯이
미래의 나역시 그일로 위로를 받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역시 꿈일것이다
그런데 꿈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이것이 나만의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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