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굴렀다
윤희상
그러니까, 정릉터널 앞에서
호주머니 속의 사과를 꺼내 먹으려다
놓치고 말았다
사과는 굴렀다
국민대학교 앞을 지나고
성북동으로 이어지는 버스 종점을 지나고,
사과는 굴렀다
봉국사 앞을 지나면서
스님의 목탁 소리를 들었고,
정릉천 복개도로를 지나면서
땅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사과는 굴렀다
내리막길이었고, 어쩔 수 없었다
사과는 구르면서 먼 하늘의 달을 보았다
멈추고 싶었다
주저앉고 싶었다
그럴수록 빠르게, 사과는 굴렀다
구르는 힘이 구르는 힘이 되었다
단지, 기울기에 따라 굴렀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저절로 사과는 굴렀다
어느새 그랬다
생각보다 먼저 사과는 굴렀다
지나가는 개가 물고 가지 않았다
미아리의 홍등가를 지날 때는
황홀한 불빛이 좋았다
그럴 때도 있었다
종암경찰서 앞을 지나고,
아래로 아래로만 사과는 굴렀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과는 구르면서
껍질이 벗겨지는 아픔이 있었다
사과는 구르면서 먼 하늘의 해를 보았다
이제 씨만 남은 사과는
고려대학교 부근의 길목에서
멈추었다
우연히 그랬다
아니다.
구르는 힘을 잃었다
씨앗에 싹이 트고.
비가 내렸다
그곳에서 뿌리를 내렸다
사과나무가 자랐다
하늘은 높았다
당연히, 사과가 열렸다
빛이 스며들 틈이 없었다
나무 아래, 넉넉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시간은 뭐지?
내가 알고 있는 시간이란 무엇이지?
그래 어쩌면 굴러가는 것?
그럼 어쩌면 시간은 시계위를 동그랗게 돌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구르며 지나가는 것?
눈에 보이는 시계의 뾰족한 바늘은 매일 같은 모습으로 같은 곳을 지나간다.
시간의 흔적을 시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사과가 곧 시간이다.
사과가 돌돌 굴러가는 것이 시간이다.
어느 사과는 동글동글해서 잘도 잘도 굴러간다. 잘 굴러가는 것들은 덜 벗겨진다.
어느 사과는 기우뚱하게 생겨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부딪히는 데가 맞아 여기저기 상처가 생기기도 한다.
어디로 어디로 굴러갈 것인지....
시인은 사과가 굴러간다고 말했고,
시인의 사과는 오지랍도 넓어 성북구를 전반적으로 돌아다닌다.
더는 굴러다니지 않고, 멈춰!
그리고 구르던 힘으로? 아니 잃어버린 구르는 힘때문에 멈춰.
말할 생각이 아니었다는 상처가 없었다면 씨를 사과를 뚫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기우뚱하게 생긴 시인의 사과는 상처가 났고, 상처의 틈새로 씨는 사과 안을 탈출했다.
구르느나 생긴 진물은 물과 거름이 되어 뿌리를 내리는 일을 도와준다.
사과가 멈추자,
사과의 씨가 사과를 탈출하자,
비가 내려 사과씨에 싹이 돋게 하고, 뿌리를 내리게 하고, 나무로 자라게 하고, 그늘이 되게 하고...
사과가 구를만큼 구르고 상처난 채로 구를 힘을 잃어버려 멈추자
사과에는 씨가 돋아나, 싹이 돋아나,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었단다.
사과나무는 거기에 있단다.
사과나무는 그 곳에 있으며 사람들을 멈추게 한단다.
시에서는 보기 드물게 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 시에서 시간이라는 것이 사과의 움직임을 따라가다보면야 긴 시간이지만,
설핏 옆 눈길을 주고 있으면 찰라와 같기도 하다.
사과가 굴러가지 않기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사연을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저 무심히 굴러가면 말이다.
순식간에 사과였다가 사과나무였다가...
굴러다니는 멍든 사과였다가 그늘을 주는 사과나무였다가...어느덧 내가 사과나무가 되었다가...
'농담할 수 있는 거리' 의 윤희상시인이 새로운 시집 [소를 웃긴 꽃]을 발표했다.
바닥에 잔잔히 깔아 어쩌면 보이지도 눈에 띄지도 않을 우리들의 감! 정!을 살살 간지른다.
소를 웃긴 꽃처럼 이 시집은 내 발바닥도 가지럽힌다.
딱 참을 수 있을만큼 요리를 해가며 간지럽힌다. 간지럽다고 소리지를 수 없도록 딱 그 만큼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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