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히는대로 詩

[손택수] 버려진 집 속에 거울조각이 있다

by 발비(發飛) 2007. 6. 9.

버려진 집 속에 거울조각이 있다

 

손택수

 

집을 버리면서, 거울을

두고 오는 건 차마 못할 짓이다

 

버려진 제 모습을 쳐다볼 수 없어

먼지를 풀썩이며 조용히 미쳐가는

집의 거울을 보라

 

집은 제 얼굴에 화장을 하는 대신

거울에 화장을 한다

거울에 파우더 분가루 같은

먼지를 덕지덕지 처발라

망가져가는 제 얼굴을 흐릿하게 뭉개어본다

 

그렇게 남은 날을 견뎌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친 형벌이다

 

폐가는 금이 가거나, 깨어진

거울조각을 품고 있다

 

 

 

여자치고 거울을 참 안 본다.

거울 속의 내가 마음에 안 든다는 것, 내가 못 생겨서라기보다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나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거울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 모든 것들에게 내가 기억되지 않도록

 

거울이라는 것은 나를 비추는 것이다.

내가 보던 거울을 보는 사람은 자신의 얼굴이 낯설 것이다.

자신의 모습 뒤로 내가 보일테니.

 

그래서 산산히 조각낼 것이다. 가루가 될 때까지....

거울 속에 저장된 나까지 산산히 조각날 때까지....

그가 새로운 거울을 장만해 그  앞에 섰을 때 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민하] 哀人  (0) 2007.06.12
[신현정]시인의 말  (0) 2007.06.11
[이윤택] 살아있다, 난  (0) 2007.06.08
[복효근] 당신이 슬플때 나는 사랑한다  (0) 2007.06.08
[박정대] 되돌릴 수 없는 것들  (0) 2007.06.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