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히는대로 詩

[최승호] 몸의 신비, 혹은 사랑

by 발비(發飛) 2006. 12. 29.

몸의 사랑, 혹은 사랑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 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뽀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레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몸은 몸의 어떤 부분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몸은 몸의 어떤 부분이 무슨 짓을 해도 용서를 하고

몸은 몸의 어떤 부분이 난자되었더라도 묻지 않고

 

몸은 몸의 전부를 사랑한다.

 

그런데,

 

몸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몸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건

 

몸에게 상처를 입히는 마음이다.

마음은 몸이라는 집 속에 주인자리를 차고 앉아 몸이 사랑하는 몸의 어떤 부분을 해친다.

때로

아주 가끔

몸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만, 대부분은 마음은 몸을 이용한다.

상처받은 몸은 그냥 모른척 내버려둔다.

 

몸은 몸의 어떤 부분도 다 사랑해, 밤낮없이 꿰매고 있다.

 

몸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몸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마음?

 

몸이 몸만을 사랑하는걸까?

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 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생각은, 몸은 몸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몸 안에서 살고 있는 마음이 아무리 사고를 치더라도,

그래서 몸이 모두 망가지더라도,

몸은 마음을 사랑한다.

몸은 마음을 기다린다.

마음이 몸과 꼭 맞는 그런 순간을 지치지 않고 기다린다.

그런 것 같았다.

망가지고 부서질 때마다 몸이 꿰매고 있는 것은 마음이 들어앉을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마음이 몸에 꼭 맞게 들어앉아 흔들리지 않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몸은 몸의 어떤 부분이 아프면 오랜 시간 꿰매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그럴 때면 내 몸은 퉁퉁 붓는다.

일주일 전부터 붓기 시작하던 내 몸은 풍선처럼 터지려하고 있다.

마음의 상처가 몸을 해친다.

지금, 이 시를 만난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몸의 이야기를 하다...

결국 몸이 마음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붓고 터지고 깨지더라도,

그것이 마음때문이더라도 몸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몸에 뿌리를 박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면.

 

혹은 사랑?

 

그래, 사랑도 그렇구나....

 

나를 다치게 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돌기는 마음과 한가지다.

몸이 마음에게 그렇듯

나도 사랑에게 그럴 것이다.

이건 의지가 아니라 그렇게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몸의 신비, 혹은 사랑.

때로 시는 잠언이다.

오늘 이 시가 내게 그렇다.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 신춘문예 당선시  (0) 2007.01.01
[현대문학추천집] 천상병 강물  (0) 2006.12.31
[W. Whitman] 나는 앉아서 바라본다  (0) 2006.12.29
[최승자] 기억의 집  (0) 2006.12.27
[김근] 빨강 빨강  (0) 2006.12.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