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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근] 빨강 빨강

by 발비(發飛) 2006. 12. 21.

빨강 빨강

 

김근

 

피를 다 소진한 누리끼리한 염통이 저 혼자 바싹 마른 혈관을 흔들어대면서 골목 뒤편으로 사라진다 고통이 짜르르 따라간다 새까만 정거장에서 사내는 무당개구리처럼 배를 뒤집는다 배가 빨갛다 빨갛게 사내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돌기가 너무 많았다 빨갛게 말라간다 그는 곧 푸석 푸석,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설령 제 색깔을 잃어버린 염통이 다시 돌아온대도 그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고통도 없이 빨강 빨강들이, 새까만 정거장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다닐지 엉금엉금 기어다닐지 맴맴 돌지 어쩔지 모를 일은,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은 모를 일이다.

근래에 나를 흔들어대던 김종삼, 박재삼, 천상병, 장석주, 황지우, 정호승..... 시인까지.

매일 다른 시집 한 권을 들고 하루씩 읽었다.

 

하루는 김종삼시전집

하루는 박재삼 사랑이여

하루는 천상병전집

하루는 장석주 완전주의자의 꿈

하루는 황지우 어느날 나는 흐린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하루는 정호승 서울예수

 

지난 일주일은 그렇게 살았다.

고향과 같았다.

좀 더 오랜? 시인일수록 나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긴 숨을 쉬며 쉬게 해 주었다.

 

序詩

 

김종삼

 

헬리콥터가 지나자

밭 이랑이랑

들꽃들이랑

하늬바람을 일으킨다

상쾌하다

이곳도 전쟁이 스치어 갔으리라.

 

悲歌

 

박재삼

 

잔잔한 노래만을 외우면서

결국에는 별까지 가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더냐

 

서럽지만 하는 수 없이

땅에 묻히고

밝은 데는 어림도 없고

캄캄한 데로만 가는 것이

누구에게나 예비되어 있을 따름인데,

아, 온갖 발버둥치는 것을 섞어도

이 엄정한 사실에서

한치도 벗어날 장사가 없네

 

그러니 오늘

환한 꽃이 물에 어리는

천하가 제일가는 경치를

원대로는 보고 간다마는

어쩔거나,

그것도 눈물을 배경으로

누리는 것이 그 전부라네.

 

어두운 밤에

 

천상병

 

수만년 전부터

전해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이 시들을 소리내어 읽다보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머문다.

슬프면 슬퍼서 웃음이 나고, 아름다우면 아름다워서 웃음이 나고...

아주 오랜만에 외할머니의 손등을 만지며,

손등의 헐렁해진 살갗 주름을 올렸다 내렸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주름을 보며

맘이 짠하면서도 낄낄거리며 장난을 하게 되듯

이 시들은 내게 그렇다.

 

浮浪

 

장석주

 

오, 나는 상처 받았다. 세상은

바람뿐이구나. 모래 섞인 바람 속을 걸어서

갔다. 남루한 몸뚱아리에는 눈물 뿐이구나.

어머니 건너가고 싶어요. 이 어둠의 뿌리를

간질병의 흰 이빨로 물어뜯어 짐승처럼

울며, 오, 저 고요한 하늘 불의 어둠 속으로

지워져 가는 몇 마리의 새처럼.

길없는 허공 위에 바람이 흩어졌다 모이고

다시 흩어져 어디론가 떠돌 듯.

늦게 켜지기 시작한 저녁 불빛들

좁은 골목길에 낮게낮게 몸을 굽히고, 나는

자꾸 걸어내려가 낯선 항구에 닿았다.

一泊의 잠자리를 얻기 위하여 떠돌 때

흐르고 흘러서 이 구석까지 밤이 왔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학교 뒤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을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또 이 시들을 읽으면 뿌듯해진다.

학창시절 아니, 지금이라도 이 시를 접할 때면 그 시절의 내가 참 가득하게 느껴져 뿌듯해진다.

이해하지 못할 말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시들이다.

소리내어 읽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은 활자 위를 다녔지만, 눈 뜬 봉사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때도 지금도 이 시인들의 시집들이 나의 책꽂이 어디에 꽂혀 있는 것만으로 뿌듯했고 뿌듯하다. 난 달라! ...... 이 시들은 내게 그렇다.

 

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또또 이 시, 시를 읽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한다.

내가 못하는 나의 이야기를  대신해주는,

엽서에 이 시 한편을 적어보내는 것만으로 나의 마음이 전달되는 그런 시. 너도 나도 모두 알아듣는 시.

'서울 예수' 시집에 나오는 시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시이다. 좋다.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처럼 , 혹은 그보다 더 쉽게 애절하게 말한다.

우리들은 이 시를 나눠가졌다. 그때!는 그랬다.

결국 난 변하지 않은 거였어. 이 시는 내게 그렇다.

 

 *

김근 시인의 '빨강 빨강'을 읽다가  왜 이리 멀리 왔을까.

좀 오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마치 고향에 간 듯이 며칠 잘 쉬었다.

김근 시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휴가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같다.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자, 온갖 종류의 차들이 길에 빽빽하다.

멀리서 빌딩들의 불빛들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들이 불그림자처럼 번뜩인다.

뭐 그런 느낌.

빨강 빨강. 반짝이는 서울의 네온들처럼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환하게 불을 밝혀 서울이 서울임을 보여주는 곳이다.

불 켜진 곳으로 가야한다.

따라 부르지 못하는 힙합이 배경음악인 그들의 땅, 이 곳에서, 리듬을 타며 몸을 움직이며 살아가야 한다.

 

소리를 내어 김근 시인의 '빨강 빨강'을 읽으면 마치 연극무대 맨 앞자리에 앉은 듯 숨이 가쁘다.

가슴 아래서 무언가 헉하며 몰려온다.

몸은 절로 리듬을 타고, 시 안에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빠진다.

이건 내가 불빛 휘황한 서울이라는 곳에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같은 것이다.

그들의 불빛 아래, 그들의 리듬에 맞춰 몸이 흔들린다는 것.

 

이 시를 자판으로 두드려도 마찬가지다. 두두두두두 ... 쉽게 두드려진다. 숨이 가쁘게 두드려진다.

따라부르지는 못하지만, 손가락이 리듬을 타고 자판을 날아다닌다.

쌩하니 날았다.

몸을 흔들며, 새처럼 날아서 내가 간 곳은?

주민등록증 보여주며 떨리는 맘으로 무도회장 앞에 섰다.

나의 행색에 갸웃하는 그들, 한번만 눈 감아준다는 웨이터의 느글거리는 눈에  웃음으로 답하며 

그들이 즐겨논다는 무도회장으로 겨우 들어선 느낌!

김근 시인의 '빨강 빨강'이다.

익숙하지 않다는 것

낯설다는 것.

내가 쓰는 말들이 다르게 조합된다는 것. 생소함.

생소함이 익숙해져야만 오래도록 옆에 끼고 있을 수 있는건데,

이 시가 저 위의 시들처럼 오래도록 내 옆에 있을런지는 알 수 없다.

낯선 리듬에 몸이 반응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어둔 곳에서 들키지 않게 놀다가자!

 

그 다음엔......무엇에 빠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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