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은 자기 치유이다.
소설의 힘은 관계 치유이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내게 그렇다.
내게 만약 시의 시간이 없었다면, 자존감이 바닥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내게 만약 소설의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대인기피증 환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문학의 힘으로 치유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섭섭하다 하겠지만 말이다.
시는 부끄러웠던 모든 것이 부끄러웠던 나에게 돌과 풀과 하늘과 바람 곁에 딱 붙어있으라 했다.
그 곁에서 점점 단단해지고, 서늘해지고, 질겨졌다.
소설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타인을 두 눈으로 쳐다보게 했다.
소설을 알게 되면서 부터 타인은 묵살해야 하는 대상이 아닌, 내가 한 마디 말을 건네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나는 시를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했다.
나는 소설을 통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와 소설은 멀어졌다.
오늘 또 한 명의 소설가를 만났다.
이 소설가는 15년 혹은 20년 전에 하이텔에서 소설을 연재했던 장르작가이다.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하면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야기를 모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문학소설을 쓰는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모으고 싶었지만, 그들과는 잘 되지 않았다.
문학은 너무 높이 있어서 이야기라 불리기를 꺼려했다. 다른 무엇인가가 되기를 다들 바랬다.
작년에는 20년 전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팬덤을 끌고 다녔지만, 지금은 실명이 되어 작업을 할 수 없는 작가를 만났다.
또 작년부터 올해까지는 이 작가에 버금가지만 숨어버린 작가, 불러도 대답이 없는 작가를 끊임없이 불러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다.
이 작가의 작품은 32권 미완결 작품인데 이제 완결을 목표로 집필을 시작했으며 동력은 직장인으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계약금이다.
나는 이야기를 복원시키는 것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새삼 실감한다.
오늘 만나 어렵게 재계약을 한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대기업 게임회사의 스토리작가로 일하고 있었다.
몇 번의 뒷걸음질을 못 본 척하고 그의 이름을 수없이 불러댔다. 그리고 그의 후속작 날인을 받았다.
이 이야기들은 한때 나의 치료제였던 시와 소설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소설들이다.
그들에게 문학을 붙이는 것을 어떤 이들은 싫어한다.
한때, 예술 혹은 문학숭배주의자였던 나는?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좋아졌다.
이제는 치유가 아니라 흥미를 찾아, 재미를 찾아 다닌다.
나는 작가 소환을 통해 자연스럽게 진화하고 있다.
10년. 20년 전에도 존재하였으나 나는 몰랐던 이야기의 세상
뒤늦게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때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그들은 20대였다가 40대가 되었고,
본인들의 작품을 그대로 낼 수 없다며, 모두들 고쳐서 다시 내고 싶다고 한다.
나는 농담처럼 말한다.
"지금보다 그때가 나을 수도 있어요. 맞을 수도 있어요."
나도 생각한다.
'지금 재미있어 하는 것보다, 그때 재미있어 했던 것이 맞을 수도 있어.'
분명한 건 나라는 사람은 시와 소설이 언제나 새로운 삶의 시작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모른 척 할 때의 삶과 아는 척 할 때의 삶이 다르다.
어떤 식으로든 자각하게 만들고, 자각은 움직이게 만든다.
오늘 나로 인해 세상에 곧 소환될 작가와 내가 좋은 인연이라 더 좋은 일의 시작점이길 기대한다.
지난 한 달은 오래된 계약을 많이 했다.
-딴소리-
사랑을 분석하고 분류하고 정리하면 결국 남는 것은 '나'이다.
-사랑의 온도 중에서-
'주절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訃告] 스마트폰, 컴퓨터 (0) | 2017.11.28 |
---|---|
젊어서 몰라 (0) | 2017.11.13 |
잠-수면장애- 6호선 (0) | 2017.10.19 |
원룸텔 구두 (0) | 2017.10.19 |
일주일의 휴가 (0) | 2017.08.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