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비
마광수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안 쓴 우리는
사랑 속에 흠뻑
젖어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같이 쓴 우리는
권태 안에 흠뻑
갇혀있다.
다시 비
비는 내리고 우산을 따로 쓴 우리는
세월 속에 흠뻑
지쳐있다.
흐음~ 했다.
마광수 교수의 [사랑이라는 환상]이라는 소설의 머릿말을 대신하는 서시이다.
분명...,
우리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대개 우산은 없고, 비는 내렸고 흠뻑 젖었다.
서로에게 닿는 살이 너무도 따뜻했다.
그리고 분명...,
우리가 함께 있게 되었을 때, 우산이 있었고, 그 안에서 함께 비를 피했다.
어깨가 비에 조금 젖을 때마다 온몸을 돌돌 말며 서로를 성가시다 했다.
그리고 또 분명...,
지금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따로 쓰고는 서로의 우산이 부딪히지 않기 위해 멀찍이 떨어졌다.
함께 비를 맞을 생각도, 우산을 나눠 쓸 생각도, 서로를 쳐다볼 생각도 없다.
또 비가 오겠지.
누구의 것일지 모르지만, 홀로 썼던 우산을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날 지도 모르지.
그때 우리는 서로를 볼 수 있을까?
서로에게 우산 한 켠을 내어 줄 수 있을까?
결국 남은 우산마저도 잃어버리거나 고장이 난다면,
우리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을테고,
... 사랑에 흠뻑 빠질 수 있을까?
사랑은 거기에 있을까?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마광수교수의 산문보다는 시가 좋다.
에세이든, 소설보다는 시가 좋다.
분명 [가자 장미여관으로]는 멋진 시집이다.
시인은 원래 분란(紛亂)의 원흉이어야 한다.
분란이 있어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쓰실 분이다. 시와 같은 멋진 작품을 기대한다.
작가의 말이다.
"나는 소설이 주는 재미의 본질이 결국은 ‘감상感傷’과 ‘퇴폐’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복잡한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일지라도 그런 주제의식은 ‘포장’이 될 수밖에 없고, 기둥 줄거리를 통해 독자가 얻는 카타르시스의 본질은 ‘감성을 억압하는 엄숙한 이성으로부터의 상상적 탈출’과 ‘답답한 윤리로부터의 상상적 일탈’을 통해 얻어지는 ‘감상’과 ‘퇴폐’에 있다. 거기에 곁들여 추가되는 것이 있다면 ‘과장’ ‘청승’ ‘엄살’ ‘능청’ ‘비꼼’ ‘익살’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얼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것도 치장하지 않거라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차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식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1979-계간지 문학과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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