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를 볼 수 없는 계절
조연호
양철집, 겨울
새들은 늘 날개로만 흘쩍거린 느낌이었다
여자는 커서 더럽혀질 거랬어. 소녀는 아주 오랫동안 자기 발목을 깎았고 이제 부러질 것 같은 발목을 안심하며 바라본다
양철집, 겨울
새들은 날아간 만큼 죽어 있는 느낌이었다
휴학해, 우리는 니가 아무리 날아올라도 추락한다고 생각할게 추위와 더위를 착각하면서 하루 종일 그네를 탔다 딱 한 걸음 분량의 증발과 함께
가로수 수리점엔 의족처럼 나무들이 때를 벗기는 꿈 코를 푸는 꿈
이제부터 나는 잎사귀를 떼고 겨울의 방향으로 10년은 더 걸어야 한다
양철집, 겨울
새들은 내려오는 형식의 사닥다리를 잃고
뒷굽이 많이 닳은 구부정한 물을 마셨다
지워지는 것에 대한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양철집, 겨울
고구마 스탬프로 새를 볼 수 없는 계절을 찍는다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대부분의 날은 낯선 여행지보다 집이 더 평화롭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가끔은 여행지의 낯섬이 평화를 줄 때가 있다.
솔직히 나는 거의 대부분 그 반대이지만...
일상의 발견이나 가족, 아니면 사랑에 대한 경험을 사실적으로 녹여내어
가슴을 치게 하는 시들은 .. 가슴을 치는 순간 내 안에 얽힌 일상이나 가족, 아니면 사랑이 더불어 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눈물짓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게 내려가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그것을 소화시키지 않은 그대로 마치 체증처럼 가슴에 쌓아두고 싶은 순간도 있다.
무거워하면서도 그것이 소진되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은 고통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겹겹이 묻어두고 싶은 순간도 있는 것이다.
조연호의 시들이 그렇다.
참 많은 남들의 사연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 사연들은 결국은 가슴속에 꼭꼭 덮어둔 시인의 사연인 것이다.
시인 또한 드러내고 싶지도 사라지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가슴이 무겁고 간혹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가슴팍에 쟁여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로 그것들을 덮어두었다.
그의 시를 읽는 나는 시인의 가슴에 묻어둔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사방에서 끌어다 묻어둔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그 안에 묻어둔 것이 대충 어떤 것인지 짐작이 되기도 한다.
여행지의 시간들이 그렇다.
여행지라는 공간은 모두 낯설다.
땅의 색깔, 하늘의 크기, 사람들의 말소리, 먹고 마시는 것들까지도 모두 낯설다.
하지만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내 안의 것들을 집과 같은 알몸으로 돌아다녀도 전혀 더는 내보일 것도 없어도 그것이 치부가 되지 않는 곳이 아니라
내 안의 것들을 가슴에 쟁여두고도 낯선 여행지의 삶으로 설 덮어놓고 싶은 때도 있는 것이다.
일상이나 가족, 사랑까지도...
모두를 정리하고 내려놓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럴 때에는 조연호 시인의 어슴푸레한 저녁처럼 그렇게 설핏한 어둠으로 가슴에 묻어두면 되는 것이다.
선명하게 말 할 필요가 없는 때도 있는 것이다.
조연호 시인의 제 2시집 <저녁의 기원>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앞부분의 연작시를 제외하고 아래 더 보기에 타이핑 해보았다.
간혹 그의 시가 읽고 싶을 때가 꼭 있을 것 같다.
묻어두고 싶을 때....
그리고 묻어두고 싶더라도... 그의 시가 저절로 선명하게 올 때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더불어 해본다.
파헤치고 싶지 않는 시들이다.
<제2시집> 저녁의 기원
제2부 저녁의 기원
벌레를 쥐고 태어난 아이(1983-1986)
오늘이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우주가 검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여름 태풍이 만찬 식탁처럼 많은 촛대를 세운다는 것
계단에서 떨어질 뻔한 일주일 뒤
작은 북의 연주가 시작되기 2초 전
나는 공중목욕탕에서 물에 뜨는 연습을 했다
태양은 나눗셈에게로 꾸준히 가까워지고 0에 더 가까워지고
일제 탁상시계를 들고 아버지가 사우디에서 오시던 길
오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2층에서 여자가 뛰어내렸다는 것
집고양이의 긴 수염 끝에 운 좋은 예감이 생겼다는 것
한번도 떠올려보지 않은 생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정인(情人)께서는 농담을 잘하고
그건 죽기 전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귀가 시린 겨울은
삭제의 방식으로 광장에 얼마간 서 있어야 했다
옥상은 멈추지 않는 긴 딸꾹질을 시작하고
<니르스의 이상한 여행>을 읽는 친구들은 날지 않는 오리에 대한 각별한 생각
오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일은 탁자 아래 탈탈 털어대는 산만한 너희들의 다리를 생각하며 하늘에서 언젠가는 눈이 내릴 거라는 거
떠오르는 것을 기준으로 모든 바닥이 시작된다는 거
아버지의 낡은 탁상시계는 아직도 째깍이며 0시를 향해 떠오른다는 거
온실에서는 어린 새잎이 자기 머리에 리본을 묶고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한번은 작아지는걸요
이제 곧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손톱이 자라는 시절
부풀 때처럼, 내리는 눈이 운동화 한 짝씩일 때처럼, 결빙과 증발에 대한 나의 착각처럼
나는 수형도(樹型圖)의 맨 아래쪽에 있었고
악몽은 가장 꼭대기에
사라진 그녀들
언니의 벽이 참 마음에 듭니다.
숲
깜짝 놀랐어요. 당신에게서 구겨진 물들이 걸어나와서
부드럽게 고백하는 저것을, 수많은 창마다 얼음이 치솟던 그곳을 무덤이라 불러봅니다.
항아리는 비밀로 가득 차고
항아리 속의 할머니는 생쌀을 가장 탐내고
배고플 때마다 밥 짓는 냄새를 쫓아 내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옵니다.
점점 그녀들이 되어가고 있는 무덤.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는 처음입니다. 마치 버려진 4월 같아요.
태양이 굴러 떨어질 때마다 땀띠가 돋는 자리
숲
언니의 벽은 참 마음에 듭니다.
팔다리 없는 것이 되지 않고는 자기를 영원히 뒤집어 놓을 수 없다는 걸
그늘과 구름은 수위(水位)로 말하려 합니다.
대화로 혹은 혼잣말로 아가씨들은 모두 달리기를 잘하고
월경(月經)으로 온몸이 더러워지고
우는 해파리처럼 모래 해변을 떠다닙니다.
사라진 그녀들은 때때로 나머지 절반의 생보다 더욱 훌륭하여
그저 끝도 없이 헤엄치고 싶던 주머니 속.
최대의 걸음걸이로. 밥이 사라질 동안. 불구처럼.
이렇게 순도높은 곡선은 당신의 문턱 이후 처음입니다.
달의 보폭은 점점 넓어지고
겨울은 코가 사라지고
종(種)의 냄새가 서서히 기억에서 지워지는 시간
내 피의 농담(濃淡)을 들여다보고 문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열어봅니다.
첫번째 문이 첫번째 문과 화해할 때
숲
우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공기과 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부(殺父)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공은 불화를 청하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고디바부인의 일몰과 일출
잔디들이 울고 있어. 진심으로, 부푸는 쿠키들처럼. 태양은 빛나고 우리는 묘비 위를 달린다. 신발을 가슴에 안고 잎들이 집 떠난 애들처럼 떠 있었어. 나는 내가 뭘 봤는지 말할 수 없는 나무. 겨울 이상의 것으로 하품이 나오려는 순간. 나는 내 뒤를 쫓았고 우리는 만나 눈먼 얼굴을 만지며 기쁘게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주물 공장과 커피 공장은 이곳에서 저곳으로라고 쓴다. 금잔(金盞)과 원두를 한 줌씩 쥐고 나는 점점 빨리 달린다. 잘 가라 내 방. 빛나고 빠르지만 발이 없는 나무. 이곳을 지나친 시계들은 물고기처럼 입 벌리고 솜털이 사라지려는 순간을 기억한다. 더러 내 미래보다 더 빨리 달릴 때 나는 말 위의 고디바와 여섯 개의 다리를 생각했다.
식판에 음식을 받쳐 들고 나는 달렸다. 태양처럼 달리기 위해선 내게 꽃을 바치고 날마다 베개를 빨아야 했다. 내 결혼관보다, 내 여성관보다 더 빨리 지붕은 치마를 물들이고 늘 새롭게 태어났어. 밤이 우릴 내몰면 난 내 눈을 만지고 앗 뜨거, 라고 말할 거예요. 나는 내 운명보다 더 빨리 달렸다. 지친 말의 네 다리와 고디바의 두 다리에게 낡은 빵 광주리를 전하기 위해.
묶어놓은 자루의 구멍에서는 그해의 귀리가 쏟아져 내렸다. 고디바 부인을 훔쳐보다 눈이 먼 재단사 톰, 우리는 공기보다 더 많은 구멍을 가지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는 착각. 모두들 두 손을 벌리고 톰의 검은 눈에서 술과 과자가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우린 달릴 때만 생의 딱 하루를 용서했다는 착각. 고디바 부인은 푸른 이끼를 밟으며 마을을 돌았다. 숲에선 네 발 달린 짐승과 두 발 달린 짐승이 흰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나는 어떤 글, 16세기와 18세기 사이, 도서관과 말의 아름다운 다리 근육 사이의 평설(評說)을 수정하고 있었다. 고디바는 흰 것을 사랑했다. 원문은 감정적이고, 검은 것에서 흰 것을 골라내는 그 작업이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내게 달리는 것과 우는 것은 같은 것이 되었다. 16세기와 18세기 사이의 책들은 누구보다 먼저 참는 것을 믿었다. 고디바는 수레에 책을 싣고 먼 길을 걷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 책에 적힌 흰 글씨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개의 책
그때 기억은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졌었다.
풍향계가 하루의 맨 끝을 향해서만 기울 때
나는 멀미를 하면서 여러 나라의 수도를 외웠다.
흐린 강에서 아이들이 키재기할 때, 왼손으로만 허공이 바람을 쥘 때, 4H 연필에서 6B연필로, 태양에서 물고기로, 친절함의 재료가 바뀔 때
나는 허물을 벗기 위해 베개가 놓인 깨끗한 숲으로 떠났다.
투명한 구름은 더 투명해지기 위해 내게 여름을 빌려주고
나무를 생각할 때마다 점점 좋아지는 내 냄새들
벗어놓고 간 신발의 숫자만큼 새로운 이별이 생긴다.
연인의 편지는 노래가사를 적거나 코 푸는 종이로 썼다.
내가 나의 껍질에 대해 거의 알았다고 생각한 순간
귀는 붉어지기 위해 내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여름의 모든 위치를 아끼고 싶었어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새에게 밥알을 던지고 그것이 검은 이빨이 되는 것을 바라본다. 꿈속을 떠가는 느낌으로 낱개가 되는 느낌으로, 양치질을 하고 세면대에 붉은 거품을 뱉는다. 녹슨 자전거에서 안녕 나의 광대여, 엽서를 쓰고- 개들이 똥을 싸는 호수 주변- 배웅과 배웅 사이에서 나는 갑충에 불과했다.
조각이 많은 그림 퍼즐 한 모퉁이를 완성하기 위해
조카들은 짝이 맞지 않는 구름들을 무릎 앞에 주워 모은다.
가을이 와, 깊이가 다른 양쪽 보조개처럼.
그날은 석물(石物)처럼 고요히 곤충의 눈알만 반짝이고
바람의 맨 끝 방은 포기와 권태의 방.
흘린 눈물과 똑 같은 맛으로 새들은 네 뺨 위를 주르륵 흘러내리고
그건 니가 아직 우릴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린 마치 아름다운 것처럼 흩어집니다.
여름 수수는 눈부신 바다로, 나는 세속에게로.
단 한 계단
거울은 나에게로 떠난다. 물에서 물로, 내가 숨기듯 조금씩 떼어 모았던 방. 그 방에서 나는 여러 개의 칫솔모를 닳게 하고 헬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제 지평선과 수평선으로 가득 찬 눈알을 아무에게도 안 보여줘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했다. 헬마, 술래잡기는 그늘이 없어서 따분했고, 지금쯤이면 얼음땡이 더 즐거울까? 작은 것과 함께 산책이면 8월은 충분하다. 난 헬마의 하루가 긴 다리라고 생각한다. 전생보다 더 깨끗해지고, 더 많은 식물로 달이 우거지고, 껌 한 통을 다 씹을 때까지 헬마의 긴 다리는 아직도 달을 향해 길게 펼쳐지고 있었다.
UFO를 찾으로 가자. 마당엔 콩이 우거졌고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의 말투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7월이 맞다, 8월은 너무 짧았고 6월은 사위들이 들이닥치면 도망쳤으니까. 달의 분화구까지 단 한 번 여행한 적은 있지만 거긴 빈 뼛속의 음악만 행복한 곳이었다. 처음 장난감을 대하던 마음으로, 죽은 새를 대한다.
헬마의 긴 다리는 아직 자신의 길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쁜 날씨는 아니지만, 물 밖으로 걸어나온 태양은 끌어안고 잠들기에는 너무 더러웠다. 고작해야 7, 8월에 수많은 영혼들을 담기 위해 묘지는 얼마나 깊이 땅 밑을 걸어갈 수 있었겠니? 물소와 사슴은 모른 척 얼마나 많이 포식자 앞을 걸었겠니?
내 눈은 사라져야 한다.
휘파람 같은 헬마, 부서져 내리는 붉은 산에는 단지 아름다우니까 가는 것이다. 신세 지는 건 아니지만, 다음엔 좀 더 가까이에서 손발이 많은 바람을 즐기고 싶다. 안 그러니? 태어나 단 한번만 허락되는 여행을 난 길고 긴 아홉살로만 배웅할 거니까.
변신이야기
서로를 향하는 동안만 구름에겐 이별이 생긴다. 사랑한 후에는 작은 꺾쇠로, 차별받는 후에는 농담의 사전으로, 넌 제비를 뽑았다.
향기 많은 꽃들이 내 머리만큼 자라 벌들을 통에서 꺼내기 시작하면 주방 아줌마는 물이 가득한 욕조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첨벙거리며 후회없이 바닥을 다 훑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동물로 숲이 가득 채워지는 날. 여름은 당근의 붉은 뿌리처럼 하나씩 뽑히며 사라지고 있었다. 구석에 서서 작은 귀를 흔드는 것으로 나의 은신술은 완성된다. 여기까지는 내 몸이 기생식물이었을 때의 길. 이제부터의 길은 내가 숙주(宿主)일 때를 향해 열린 곳.
아이들은 분말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색종이 접기를 가르쳐주었지만 그애들은 이제야 겨우 시든 튤립을 접기 시작한다. 8자놀이하는 아이들의 7시, 술래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여자애는 흡혈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자기 피를 빠는 단꿈을 꾸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잊고 싶지 않아. 나 혼자서 바람에게 그렇게 말해본다. 그날은 왼손잡이용 글러브처럼 오른 쪽으로 날아오는 것들과 마주하던 일요일. 우월의 표시로, 연대의 표시로 너는 모자를 벗고 세계관이 없는 제비를 하나 뽑았다. 겨울의 지하에서 여름의 지상으로, 수레처럼.
홀수의 달력
가장 앞 장엔 월병(月餠)맛의 태양이 자라고 맨 마지막장엔 아이들의 썰매가 내려온다
1월은 바람이 벗어놓은 구두의 수를 세고 아이들이 야위는 방
3월엔 너의 방을 구름으로만 채우려고 가족들이 세상에서 가장 긴 못을 쳤다
똑바로 안 하면 니 생활은 언제나 왼쪽인 거다 5월의 너는 땀과 숨을 채워 넣은 미끌거리는 수납장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열심히 하라는 말 뒤에 쥐여준 과자 봉지처럼
7월은 떠오를 때의 태양보다 사라질 때의 태양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하급신(下級神)이 몸에 들어와 여자는 그녀의 오빠가 되었다 9월은 이제 두개골 아래 희고 덧자란 이빨. 각설탕 같은 어금니를 하나 골라 쥐고 나는 오빠의 수줍은 목소리를 듣는다
11월엔 감싸안은 그의 등에서 하나하나 떨어뜨리는 동전 소리가 들렸다
손 발 다리로, 겨울의 세 가닥 선이 뻗어나가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들을 나는 거울이라 부르기로 했고 그의 등에서는 더 이상 동전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궁금해, 내 손은 왜 검은 밤하늘을 한없이 뒤적이다가 죽었을까
가장 앞 장엔 여러 개라고 적혀 있었고 맨 마지막 장엔 딱 한 번이라고 적혀 있었다
행복한 난청
구름, 소염제의 흰 쓰라림. 추운 목양견은 길 밖에서 떨고 목자와 어린 양이 긴 의자에 줄지어 앉아 성탄노래를 부른다. 구름, 잠자는 액체. 빈방의 장롱과 할머니의 치마가 한 보자기씩 내게 비밀을 풀어놓는다. 어둠과의 사랑이 끝날 때 내겐 통각을 배워야 할 시간이 왔다. 한 포기 풀이, 길게 찢어진 아이의 눈이 대낮을 일으켜 세운다. 내가 세상의 어느 지도 위에도 없었을 때 나는 손가락이 하나 더 많은 장갑을 선물 받았다. 조금씩 혀를 내밀며 어둠이 패각을 닮아간다. 구름, 어느 날은 깨진 유리로 허약한 태양을 여러 겹 쌓기도 하고 바람개비가 서풍(西風)을 종려 잎처럼 부풀리는 걸 보기도 하며 내가 가장 안전하게 지워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행복한 난청
엄마가 누나에게 죽을 떠먹일 때, 11월이 왔을 때, 누나의 쌍둥이 딸년들보다 아름다운 책은 없었다. 푸른 단풍나무 붉은 가지가 시린 혈청의 구름을 부른다. 오늘 내가 버린 수첩의 가장 가까운 미래부터 인과가 하나 둘 사라졌다. 왜 별자리 이름엔 식물이 없을까, 중얼거리며 단풍의 붉은가지좌(座)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태양이 지기 전까진 부끄러움도 숨기 좋은 방이었다. 이곳에 도착하지 않은 많은 것 때문에 아이들의 주사위는 기뻤다. 붉은 물을 토하고 누나가 쌍둥이 딸년의 운명선에 머리를 베고 손금처럼 얇게 잠든다. 모두 먼 길을 걸어왔을 때, 11월이 왔을 때, 오지 않은 12월보다 완벽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철저한 야외
계절풍 탓이다. 아빠에게 척추 부근을 얻어맞고 눈물 글썽이며, 이건 여행인데, 떠나온 건데, 어째서 떠난 것들이 모두 부러운 걸까, 생각했다. 좁은 바늘귀를 가진 빛의 기둥에 기대어 창은 더 이상 얇아져서는 돌아갈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전신주와 변압기의 수역(水域). 바닥에는 잠든 선단(船團), 포플러의 혀가 만드는 풀무질, 한 묶음의 거품알들이 모두 방계(傍系)로 흩어져간다. 가끔 약산성의 눈물이 여공들을 싸구려 은박지로 포장해주었다. 너무나 많은 여행이 달력 밖의 길을 택했다. 구름 아래 흐르는 더러운 물을, 달의 바다에 떨어지던 태양의 물을, 나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상수리 숲에서 물결 소리를 듣기 전까지 나는 윤회가 꼭 둥근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402호의 일생
402호로 오고 나서부터 줄곧 비는 해파리처럼 떠다녔다. 더러 토요일까지 귀는 흔들리고 저 재활용 쓰레기는 언제 누가 가져갈까 그보다 먼저 내 뼈는 언제 누가 부러뜨릴까
나는 올빼미의 밤을 통과하며 편지를 읽는다.
이대로 구덩이를 만졌던 손으로 또 너를 만져도 괜찮을까? 손과 팔이 날아오르면 402호는 처음처럼 균일해지겠지. 코 묻은 돈을 뺐고 달릴 때 동공의 크기만큼 세상은 좁아졌다. 비 때문에 402호는 입이 매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뒤통수에 더 많은 거품을 칠하고, 부인이 죽은 3년 전을 더 사랑하고, 많은 가위가 사각사각 머리카락을 떨어뜨리지만 거울이 알고 있는 비밀의 방은 결코 하나.
버려진 소년들로부터
새로운 소녀들이 온다.
우리는 모두 열렬히 봉투의 마지막
편지칼을 쥐고 무지개가 되어 피부 위로 떠오른다.
저쪽 해변
수컷끼리
해변을 약속하는 게 아니다
바다로 가기 전 반드시 머리를 빗고
우리의 악몽은 입 주위에서 쏟아지겠지.
길 끝에서 서서히 한쪽 눈이 감기는 것. 나를 낳은 여자를 첫눈에 알아보는 것. 일생 . 4세와 5세가 된 아들과 백미터. 2백미터 장애물 릴레이는 거리가 같습니다. 이 해변은 땀방울 이상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잠이 수많은 나를 풀어놓는 것. 일생.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길고 긴 시말서를 써야 하는데 나는 물결을 보며 붉은 색. 옛일을 추억하고 있었다.
남은 먹이를 다 주고 늙은 고양이를 버리러 저문 물가로 갔다.
왼쪽 눈언저리에 털이 자라지 않던 너는
아이들의 공이 되어 이리저리 공원을 굴러다녔다.
4층 계단 아래 차오르는 세상의 붉은 것
나는 뚜껑 아래 가만히 앉아 소녀에서 소년으로 한 눈금씩 부패한다.
사할린으로 가는 순록
그는 사할린으로 한 번 떠났지만 나는 사할린으로 매일 떠납니다. 뒤가 트인 북 하나 들고 우물 없는 마을에서 친구를 사귀겠지요. 내가 고른 줄에는 참으로 공평함이 없습니다. 이 느리고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들로 인해 저의 탄식은 거의 두 배 빠르기로 상쾌해집니다. 뿌리는 유난히 멀어지구요, 드디어 마차가 말을 앞지르구요. 고무줄이 가장 우아해질 때까지 길게-여름까지- 잡아당기고 있었어요. 구름 위를 날아가는 효모 공장이 되기 위해, 익사자의 다리를 붙드는 물의 긴 풀줄기가 되기 위해, 줄은 소리와 침묵이라는 황금 분할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무도회장으로 떠나야 할 것처럼 줄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어요. 감광지처럼 태양 뒤쪽으로 나를 검게 떠오르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도서관의 책들은 증발하여 이제 사람들은 몸에 돋는 소금을 핥는 기분, 순전히 노역으로만 독서를 합니다. 사할린으로 떠나면 꼭 순록의 뒤를 쫓도록 하세요.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종이들, 가장 어두운 태양의 강당, 침묵이 아니면 무엇으로 그곳을 채울 수 있을까? 그곳에선 콩이 가득한 강도 보일 것이고, 여우와 새의 말싸움을 지켜보기 위해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 A, 당신을 부르고 바다가 얼기만을 기다릴 수도 있을텐데.. 우화(偶話)는 최대한 하얘지고 왕은 수염을 사랑합니다. 오늘의 발자국은 사망 모든 곳에 찍혀 있었지만 어제의 발자국은 아무 데도 걸어가지 않습니다.
몽구스와 찰리 브라운을 위하여
몽구스를 위하여: 지루함에 찌들어 소년은 상처를 모른다. 몇 장 모아본 CD를 지겹게 듣다가 한 달에 한 번 시내로 나가 막일을 해 산 멋진 20세기 명반들을 아껴 들으며 소년은 잠이 들었다. 부화시킬 수 없는 단단한 껍질의 꿈을 끌어안고 슈퍼스타들과 만나는 지친 꿈속에서도 소년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찰리 브라운을 위하여: 그러고 싶지만 (초조한 안색), 담요가 없어서 찰리 브라운은 노래하러 가버렸다. 혹은 담요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러, 함께 연을 날리러 가자, 나는 그늘로 가득 찬 운동장이 되었고 너는 운동장 끝까지 걸으며 손톱을 잘게 깨물었다.
몽구스를 위하여: 밤에도 낮에도 연필은 짧아지지 않았다. 가난하고 신비하던 논과 밭, 겨울 내내 시골 교회 찬송 소리만 이곳에 징검다리를 놓곤 했다. 다 자란 아이에게 빈 공책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나는 신발을 잃고 열아홉 살의 얇은 몸들을 생각했다.
찰리 브라운을 위하여: 추운 날 누나들은 설탕을 먹고 햇빛 속에 누웠다. 녹는 바람처럼. 겨우 지나간 하루가 고마워 CM송에 맞춰 허벅지가 경박하게 흔들렸다. 꽃을 짓밟으며 씨앗을 부리는 정원사때문에, 둥근 피리를 부른 악사의 자장가 때문에 나는 악으로 빚어진 음악을 사랑했었다. 장례 행렬 중간쯤을 걷던 두 아이는 죽은 자가 그리고 검은 방의 악보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희미한
다운증후군 아이의 표정으로 마당의 비비추는 구겨진다. 달은 담벽을 닿아본 적 없는 자기 발등 가까이로 떠난다. 우리는 무모하게 서로를 만지고 지능적으로 헤어진다. 노을만 바라보고 있으면 노을을 상상한 적이 없어진다. 희미한, 내가 있는 이곳은 지금 태양 쪽으로 가려고 해. 바라보는. 떠오르는. 1924년, 당파성 때문이 사람들이 죽는다. 이렇게 아빠와 엄마들이 사라졌구나, 라고 생각한다. 네가 눈 감을 때 돌이 시작된다. 네가 눈 감을 때 돌 아닌 것이 시작됐을 때처럼. 나를 낳는 자와 함께 사탕을 주고받고 발톱을 깎는다. 차가운 하늘은 나의 혈액을 낯설게 하고, 폭설처럼 행복해지고 싶다. 하지만 우리가 한다면 아까울 것 같다. 속기사의 손으로 빨리 사라지는 늑대를 그린다. 희미한, 천적이 없는 바다에서도 별은 죽고, 소년의 상상은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 새들이 구멍처럼 어두워져가는 것. 앞다리를 모으고 바람은 빈 그릇 앞에서 먹이를 기다렸다. 희미한. 우린 그곳에 좁게 앉아 손난로를 하나씩 쥐고 짐승의 춤을 언제까지 바라볼 수 있을까? 달의 12월, 송곳니는 자란다.
풍치지구 약사(略史)
비탈의 바람: 산턱에 텐트를 치고 그 남자는 빨랫줄에 속옷과 물고기를 말렸다. 울타리를 넘는 숲엔 굳은 살이 박이고 그 손은 평생 다른 것은 쥐어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형이 불쌍해. 군대 가기 전엔 얼마나 명랑한 사람이었는데. 엎드려 죽은 척하며 아동들은 관심 가져주기를 원했다.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너희가 톱니바퀴를 돌릴 수 있는 곳, 모래 속에 산 비탈의 바람을 다 묻을 수 있는 곳
쇼노의 비오는 날: 거울 안에 넣을 수 있는 것과 거울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것들을 우린 아직 구별할 힘이 없었다. 구름보다 무거운, 이곳의 기후는 첫 잎보다 떫은 맛, 우린 공기를 사랑했고 겨울옷에 여름옷을 받쳐 입으며 붕대처럼 단단히 말린 화장터의 흰 굴뚝을 바라보았다.
의태(擬態)의 힘: 망루의 무게는 잃은 길의 무게만큼. 여름은 쉽게 높이를 가지지 못했고 많은 물을 아껴야 했다. 마른 건천에 물결이 하나 필요했지만 구름도 물을 아꼈다. 둥근 것들은 속삭이듯 부화한다. 나비들이 날았고 잔쯤 무너진 무덤엔 쥐구멍들이 깊었다. 영혼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아직 그가 부풀렸던 둥근 기억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깊이 없는 곳: 차가운 홍차를 마시며 나는 결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저급 무신론자. 기도도 독송도 모르지만, 죽은 것들을 용서하는 건 신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붉어지는 것은 아직 태양에게 더 많은 먼지가 필요했다는 뜻.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헐벗은 가지들이 우듬지로 올라가 깊이가 없는 곳까지, 뛰었다.
자살법: 조금이라도 견디지 않으면 아이들은 또 물체 주머니를 잃을 것이고 열매없는 가지는 무정한 계절의 마디 하나를 꺾을 것이다. 웃는 가면을 끌어안고 너희는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울었다. 굴뚝과 친해지는 방법? 그런 건 바람이나 알 수 있는 일. 한 사람을 다 태우고 흰 연기는 구름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리에 오전 내내 떠 있었다. 나는 죽은 기억으로 가득 찬 흰 무균실이 부서진 무허가 주택에게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달력의 순서
너는 화살표 방향으로만 여행 떠나고 인화액 속엔 천천히 부서지며 떠오르던 6월 먼지들. 너는 어두운 공을 골랐고 바람은 병든 잎마다 검진록을 적었다. 감추고 싶었니? 생식기에서 흐르는 물물 따위를 언니와 엄마가 함께 수첩에 적어두는 게 슬프지 않았니? 달마다 너만 아는 첫날과 마지막 날의 달력이 완성될 때, 보라색 수국은 시시한 빙고게임에서 가로 다섯 줄 도제(徒弟)식 슬픔을 완성했다. 맑은 제방에 똑딱벌레처럼 하나씩 앉아 애들이 합창한다. 익숙하지 못한 척 처음인 척 우리 이대로 달력의 마지막 장까지 훌쩍 자라자. 너는 사라진 것들을 등받이 의자를 올려놓을 수도 있고 이제 겨우 누군가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나이. 우리는 강둑에 공명통처럼 둥글게 앉아 저녁의 소리를 부풀렸다. 그건 악운이었을까? 구름 속엔 얼음 고치처럼 단단히 물고기 울음만 떠다녔다. 우리가 하나씩 마음에 드는 색깔로 골라 가진 모조 반지들은 서른이 될 때까지, 이혼녀가 될 때까지, 미성년이 될 때까지, 그냥 재미로 기억했고 아무도 잊지 않았다.
나다르(Nadar), 서양 근대 미술
학교 점심시간 내 도시락이 싫어 작은 통에 숨어 밥을 먹었다. 그건 계절놀이였고 겨울의 시대. 겨울의 빛은 너희의 눈썹처럼 잔뜩 누워버린 꽃밭이었어. 하루종일 새들은 허공의 발자국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날아만 다녔다. 마주치면 안녕?이라고 말하고 머리를 한 번 쓸어내려주길 기다리는 아이는 나를 만나면 침을 뱉었다.
밖엔 비가 뿌렸고 오노도후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주둥이 좁은 술병을 하나 깨뜨리고 여러 개 발자국이 자루에서 걸어나왔지만 그건 그만큼 배웅이 익숙지 않아서였다. 출구를 찾기 위해 어째서 입구에서 길을 출발해야 하는가에 대한 긴 이야기를 나눴다. 밖엔 비가 뿌렸고, 오노도후는 젖은 신발과 마른 신발을 골라내며 늙을 때까지 잠만 잤다.
도누로 모퉁이에 있는 카퓌신가 35번지 사진사 나다르는 왜 시간으로 채워진 것들은 아름답고 공간으로 채워진 것들은 아름답지 못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미는 줄을 거두기 위해서도, 줄을 치기 위해서도 다시 줄 위로 떠난다. 남은 빵을 천천히 뜯어먹던 오후, 옥상엔 낙일(落日)과 그 비슷한 것들밖엔 없었다. 앨범을 들추며 나다르는 겁에 질린 토끼처럼 빨간 가족들을 향해 귀를 쫑긋거렸다.
길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맞는 여름 새벽은 블랑쇼를 만나는 시간. 바람은 백엽상(百葉箱)으로 들어가 수은주의 눈금 하나하나 지운다. 수국이 한철인데, 블랑쇼는 그 밑에서 죽은 가지를 줍는다. 사는 게 지겨우면 누나들과 묵찌빠를 하러 우리 집으로 가자, 저기 산 밑의 동네 , ‘의식’이라고 부르는 곳. 아이들이 베인 손끝을 핥으며 잠들었다. 극(劇)을 이해 못하니까 비극만 좋아하는 것라고 블랑쇼는 내게 말했다.
무채색 색조견표
전 안녕해요. 전 가장자리가 흉하게 뜯긴 웃음을 밤새 다듬죠. 전 악에 받친 년이에요. 이번 여름도 작년 여름처럼 처량하게 내 손을 사랑하고 내 손을 꼭꼭 씹어야 할까요? 축 늘어져 얼굴에서 흰색만 줄줄 흘리던 당신, 너무 지쳤을 때 우리는 앞치마처럼 넓게 펼쳐진 계단을 올랐다. 오르기 전부터 계속 오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꿈과 꿈은 서로를 말라깽이로 만들고 엄마는 커터로 돼지 껍질의 두꺼운 털을 무심히 깎고
아이가 죽었습니다, 라고 그 영화는 시작했다. 먼지는 가장 먼저 다정함을 보여준다. 복수의 친구에서 단수의 친구로 일요일은 돌아간다. 누군가는 속주머니가 많은 하루가 서글퍼서 가죽 가방이 된 심정으로 자기를 뒤지며 울겠지. 구름이 우리를 그렇게 대했던 것처럼,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산책한다. 아이들의 발구르는 소리를 들으며 고요한 공원 가운데로 나를 한 줌 날려 보낼 때
엄마는 늘 딸들을 꺼내던 자루였고 가난한 누나들이 구름과 사랑에 빠진다. 구름의 모든 걸 적은 작은 농담처럼-무채색 색조견표를 꺼내들고- 처음 밥다운 밥을 먹는다. 난 언제부터 나한테 반말만 하게 되었을까? 자고 있을 때의 나처럼 꿈은 늘 걷기만 하고 이제 더는 걸을 수 없는 뜨거운 벽돌 속. 수많은 복도 중에 달로만 통하는 복도에서 창은 가장 아름다운 발바닥으로 나를 밟았다.
저녁의 기원
붉은 군조(群鳥)의 물가로 갔지만 비점(沸點)이 없는 바다였다. 자기 방이 있는 큰 집을 모래 위에 그려보고 아이들의 영혼은 그 집의 흉한 창이 파도에 지워지길 기다린다. 울지 마. 니들은 공평하게 이름을 나눠 가졌고 생일 달력 위엔 천박한 평등. 아이들은 자랐고 문간에 서서 사라진 사물들에게 냉정하게 하나씩 이름 붙였다.
해식애(海蝕崖)와 백사장이 유람선의 승객들에게서 푼돈을 빼앗을 동안, 붉은 덩굴풀은 벽돌벽과 악연을 하나씩 주고받았다. 초년운은 나빴고 말년운은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 씌어지지 않은 말이 씌어진 말을 기다리는 시간. 나는 이불을 덮어쓰고 뾰족한 집게발을 꺼내던 구름의 모래구멍만 생각했다.
밤의 포자를 날리며 가로등은 낡은 지도에서 돌아온다. 실어증 걸린 청년의 철물점을 지나, 트레일러 안에서 창 밖을 흘겨보던 소녀를 따라, 지도엔 등고선이 한 개 없었다. 흰 활엽 교목이 그늘 아래 목각인형처럼 걸어나온다. 둥지와 무덤이 함께 생기던 바다 끝에 앉아 나는 부활절 달걀을 아끼며 까먹었다.
저녁의 기원
달이 노랗고 살찐 난소 덩어리로 자란다. 수납장 맨 아래칸에 개어놓은 기억이 어느 날 아름답게 자린 소음순(小陰脣)을 보여줄 때, 양(羊)의 해에, 엄마, 누나가 썩은 감자알 같은 애를 낳았어. 처량한 표정의 애를 낳았어. 부서진 담벽에 묻은 은빛 에나멜은 가로등 불빛보다 먼저 우화(羽化)하며 골목으로 날아올랐다.
오늘도 도서관에서 우생학 목록을 열람한다. 우리는 목마를 수 없는 물병자리 태생이고 산에서 길 잃어도 태연한 천박한 씨앗. 새들과 함께 나무에 앉아 더러운 발목을 말리는 게 우선이지만, 우린 허공을 몰랐고 바닥이 우릴 얼마나 천하게 여기는지를 알지 못했다. 얼마나 더 어두운 방이 이 방에 열광했던 걸까, 처음의 극장은 늘 어두웠다.
녹슨 자전거 바퀴살을 따라 여동생의 변성기가 꽁지 긴바람 소리를 만든다. 이 더운 여름을 나는 오직 청각과 착각만 믿으며 지냈다. 산역꾼들은 누가 구워도 알맞은 구덩이를 산턱에 하나씩 파고 있었다. 구멍마다 귀를 대고 멀어지는 것의 소리를 듣는다. 내가 그리워한 얼굴은 성체(成體)가 없어 늙어도 고백이 많았다.
금요일의 자매들
하루의 정오표(正誤表)를 적는다. 얌체공을 던지며 뜨거운 팔다리를 휘저으며 자매들이 마당을 뛰었다. 분꽃은 매일 다른 꽃잎을 꺼내는 행복한 매춘녀 같았고 계단 몇 단이 젖은 신발을 조금씩 말렸다. 흰색만으로 방학일기를 적고 싶어. 여름 방송을 시청하던 자매들의 채집망에는 죽은 날개들이 하얗게 묻어 있었다. 바람과 첨탑의 질긴 화해만 빼면 모든 게 안녕했다. 작은 거실에서 자매들은 두 팔로 자기를 끌어안고 즐겁지 않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났다.
내가 골라낸 오자(誤字)를 보았을 때 엄마는 많은 편지를 쓰면 잊혀질 거라고 말했다. 더운 밤이었고 카스텔라를 까먹으며 자매들은 서로 만든 종이접기를 품평했다. 빨간 밑줄을 좋아할 수도, 빨간 밑줄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죽은 별에겐 오자도, 성위(星位)도 없었다. 열병합 발전소 굴뚝 위에 모래를 쌓고 낙타는 하염없이 느리게 걷고 있엇다. 너무 긴 화해가 내 비문(非文)을 잘못 버릇 들였다. 죽은 메뚜기 등에 압핀을 꽂고 손가락에 묻은 검은 액체를 닦았지만 여름이 즐거워질 리 없었다.
루오 상회에서의 일들
주말엔 여러 개 색깔의 골무를 손가락마다 씌우고
바늘 끝과 피의 조용한 대화를 엿듣는다.
계단에서 두 번 굴렀지만
그렇게 내려오는 건 신비감 없는 일이지만
나는 연기였고 의자들은 발목만 아름다웠다.
수족관 열대어는 거품을 하나씩 물고
숨을 바닥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린다.
4번 국도는 편도선 내 이름의 과거.
가장 창피하게 팔이 자랄 무렵 나는 팔뚝의 털 같은 사람들과 우정을 쌓는다.
편지를 쓸 수 없었으니까 슬픈 것은 아주 조금만 알았다.
내일은 모든 가게가 쉴 테지만 계단이 많은 우린 쉬지 않는다.
지폐 뒷면을 햇빛에 비춰보고 희미하게 떠오르는 얼굴에게 인사했다.
엉성한 바람과 닳은 겨울의 뒷굽을 이해하려면
스무 살이 될 힘만 있으면 충분했다.
주인을 잃고 구르던 따뜻한 축구공은 겨울을 지나 봄까지
찔린 못과 함께 여기에 왔다.
가로등은 대답에서 질문으로 되돌아갈 때를 귀가라고 불렀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종아리를 붉게 부풀리던 공작실 기계는
마음을 안다고도 마음이 있다고도 속이지 않았다.
폭풍의 일기
밤이 독순술(讀脣術)로 소리 없이 전신주를 세웠어요. 동물들은 그 보답으로 내게 사춘기를 보여줍니다. 새 모공과 털갈이 후, 눈꺼풀이 내 액운에 어울리도록 얇게 녹는 걸 알지 못했죠. 그립네요, 철조망에 걸린 나의 사랑하는 이웃들, 그리워요, 나를 필통처럼 쥐고 흔들던 초혼과 재혼의 남녀들. 내일로부터 오늘로 더 많이 쏟아지는 과거들, 마술사는 초식동물의 긴 코에 쇠막대를 한 번 내려칩니다. 먼지를 마시는 느낌으로, 초식동물의 코에서 풀밭이 솟아오를 때까지.
기차는 건널목의 점등과 소등을 향해 건반처럼 펼쳐져 있었어요. 서로에 대해 가장 작은 눈금이 되어 함께 머리카락을 줍는 밤. 앙상한 엄마가 되기 위해 초식동물은 이곳의 가장 어두운 달을 행해 걸어왔어요. 발굽이 닳는 기분으로 춤을 춥니다. 가족이 사라지고 눈 내리는 인력회사를 찾아가는 날. 어떤 노래는 반드시 참이 되기 위해 혀끝에 머물고 어떤 노래는 도회지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맨 마지막 교실이 되어갑니다. 그립네요, 벗어둔 신발로 가득 찬 구름. 그리워요, 붙잡힌 목덜이에서부터 시작되던 아이들의 명랑.
오사카의 여름지진
누나들은 자고 있을 때도 어딘가 걷고 걸은 만큼 꼭 한 뼘씩 달이 늦었다. 연필 끝은 떨리고 여름은 앳되게 보조개가 팬다 이제부터 내 죄는 겨울에 관련된 것
뒤로 걷는 나무와 앞이 없는 길로만 여름이 왔다 세토나이카이 동쪽, 엄마는 스팀다리미로 하루 종일 옷 구김살을 지웠다 이제부터 내 병은 겨울과 그의 결벽에 관련된 것
부지런히 잠망경을 만들고 눈알만 살짝 내밀어 여름에서 겨울을 바라본다 해바라기는 가장 민망한 이웃과는 인사했지만 결국 자기에 대한 인사였다 불친절한 이웃은 새로 시계 태엽을 감고 이제부터 여름과 겨울의 맞붙은 뼈는 조금씩 틈이 사라진다
물 밑의 물고기는 한낮을 공간으로 기억하니까, 진흙 속을 뒤져 가장 검은 태양을 찾아내면 우린 이제 집에 다 온 셈
내가 건넌 목교(木橋)는 계곡 반대편이 여름이면 끊기고 겨울이면 서로를 붙들었다. 우기가 시작될 때 그 다리를 건너던 산사람들의 이름엔 돌림자(字)가 없었다
새까만 얼굴로 엎드려 내가 곰 인형의 헐거운 눈알 한쪽과 얘기 나누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면서도 서로의 실수는 꼭 지적했다
이제부터 내 배웅은 나 이외의 배웅에 관련된 것
한 번 흔들리면 먼지가 자라고 또 한 번 흔들리면 사랑니가 돋고
떠오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물고기들은 밤을 상자로 기억했다
사키네 가(家)의 근조등
사키네의 며느리는 뜨거운 물에 잎이 붉어지기를 기다렸고 따뜻한 잔 속의 폐경(閉經)을 오래 생각했다. 혼잣말을 즐길 만큼 위로가 많은 애는 아니었다. 종이 뒷면과의 심심한 사랑 후, 폐경의 여자는 흰 눈이 내리는 여름 한가운데로 발가락에 힘을 주며 걸었다.
숲에서는 눈썹이 사라진 엄마가 검은 꽃을 양손에 쥐고 걸어나온다. 그날 아침 사키는 장롱 속에서 이상한 걸 만졌고 그건 꼭 얼굴이 사람처럼 보였다. 쥣과(科)동물처럼 태양은 다락방에 몸을 숨기고 달그락거리는 소리로만 모두를 향해 조용히 걷는다. 어쩌면 이렇게 뜨겁고 신비한 벌레가 있을까. 좀 슨 나무 기둥을 지나 한쪽은 여름으로, 또 한 쪽은 겨울로 된 계단을 아이들이 오른다. 너의 귀는 천천히 시계를 뒤쫓았고 네 귀로 오는 소리들은 시계 반 바퀴만 가진 나무숲 같았다.
근조등 아래 모인 벌레들은 그게 자신들의 첫 번째 여행인 줄 알지 못햇다. 부인과 정든 시동들을 데리고 사키는 미끄러운 발로 이별의 산을 오른다. 자기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는 요일을 잔 속의 붉은 물은 분명히 기억했다. 분라쿠 인형과 함께 똥을 누면서 사키는 죽었다. 한 발자국과 다음 발자국 사이에 생긴 숲은 사람들의 눈엔 오래된 항아리처럼 보였다.
선생의 빗
선생은 내게 옷걸이였고 나는 선생에게 부채였다. 허기진 까마귀들이 내려앉을 동안 모자는 숨을 참았고 그림자는 태양에서 한 방울씩 빠져나와 부채를 적셨다. 서로의 신발을 탐낸 우리는 맨발로 서로의 신발이 있는 곳까지 걸어야 했다.
선생의 무덤 앞에서 아이들은 귀마개처럼 단단해져서 서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곳은 문이 없지만 문지기로 가득한 선생의 입구. 저 물렁거리는 방 때문에 누군가는 다리가 길어지고 길어진 다리를 하루 종일 접으며 또 누군가 올 것이다.
선생은 따뜻한 돌을 쥐며 겨울의 부채와 논 기분이었다. 선생은 묶인 채 여전히 자라는 초록빛 운동화의 흰 끈을 한 번 더 묶는다. 선생은 그대로 여러 번 자기의 탄식과 논 기분이었다.
통나무 위에 실린 코끼리의 여행과 그 코끼리의 발을 때렸던 사슬의 여행에 대해 말했어요. 강 하류의 방향으로 가라앉고 강 상류에서 떠오른 나를 만나는 기분이었어요. 선생은 문밖의 사람들이 줄 하나로 이어진 얇은 겨울 위를 걷는다는 걸 몰랐다. 맨발로 추운 겨울밤을 돌아다닐 때, 문득 깨어 차가운 얼음 조각이 된 자기를 주워 모을 때,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큰 빗을 꺼냈고 얼어붙은 뾰족한 숲을 머리털처럼 빗어내렸다.
네개의 문조(文鳥)알
1
여우는 술래를 숨기는 다리를 놓고 우린 남쪽 끝에서 상반신뿐인 태양을 껴안는다. 꼬리들은 영원히밤이 되려 하고 영원히 가늘어지려고 한다. 술래가 그림자 속을 걸을 때 그애는 먼 친척의 얼굴로 나를 불렀다. 오늘은 남편을 잃고 더욱 긴 소매의 옷을 입는 뱀의 결혼날. 말안장처럼 가운데가 굽어서 바람은 모두 음(-)의 계곡을 넘고 있었다. 2월을 두 개라고도 2시라고도 쓸 수 있다. 우린 고장난 시계의 하나뿐인 2시를 껴안는다. 술래에게로 이어진 긴 다리를 걸어 우린 숨겨진 결혼식에 초대받았다. 밤의 불꽃놀이 속에서 언니는 꼭짓점이 사라진 원뿔 기둥만 그렸고 다린 저편의 밤은 한없이 타오르는 네 언니의 목발 같았다.
2
여름의 낡은 손거울이 말을 한다
요란한 뼈의 합창 이후
슬퍼서 나는 검은 책이 되었다
3
손녀와 죽은 조모는 서로에게 불편한 마음을 그해의 자운영에 비유하곤 했다. 올해는 새엄마의 찻잔에 그려진 단풍이 가장 곱게 물들고 친딸은 주렁주렁 머리를 말고 치매에 걸린 남자를 만나러 간다. 달 속을 들락거리며, 흰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우린 물놀이 하고 있어요. 내가 앓는 병은 골방에 갇혀서도 벽 너머, 계절을 지나, 바다의 물결까지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기묘한 병.
4
죽은 네 엄마들과 함께 요염한 잔(盞)의 봄이 왔다. 봄날 꽃놀이에 모인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무거운 모자를 쓰고 나를 버려진 떡처럼 길 밖으로 차던졌다. 들은 것의 길이와 귀의 길이가 똑같아질 때까지 문조(文鳥)는 베개 위에 기다란 발자국을 찍는다. 술래는 남자도 여자도 없는 그들의 결혼식이 아홉 살에 어울리는 가장 아름다운 관(棺)이라고 생각했다.
서적
내 책읽기가 아름다워진 건 독서가 가장 낙후된 장르였던 시대의 일이었다. 황량한 이 별의 느낌이 좋아서 나는 옥상에서만 문장을 만들고, 필라멘트를 쥔 작은 전구는 가족들의 불면을 향해 좀 더 걸었다. 두 발을 한쪽 구두에 집어넣는 기분으로 계단이 시작된다. 악연은 모두에게 신발과 같은 것이고 이제 난 그것 한 켤레로 걸음이 점점 편해질 것이다. 팔다리 자라는 소리가 하나가득 귀를 울리는, 그 보다 더 지루한 성장은 없었다. 문지른 책받침에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걸 여자애는 무료하게 한 올 한 올 들여다본다. 책을 읽는 당신은 푸른 공을 끌어안고 최초의 파충류처럼 태양에게 말을 걸었다 : 우린 늘 태어나보지 못한 자들이고, 머리 타래는 잘라 반수(半獸)의 신(神)에게.
우츄프라 카치아, 달의 혀끝
달이 썰물로 채워진다.
모래처럼 누군가의 주머니에 달라붙어 먼 길을 함께 걸을 수도 있었다.
내일이면 또 혀가 시작되는 깊은 곳을 그리워하다가
박하 한 줌처럼 썰물이 밀려와 너의 입천장을 위로해주겠지.
물은
몰려와 안기고 우리의 머리카락을 신기한 듯 쓸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출가)
벽은
순례자의 길만 적힌 지도를 장마 내내 천장까지 그려대고 있었다. (부활)
나의 아홉 살에겐 수많은 사과와 수많은 곤충이 살고
안개 같은 털장갑을 끼고 신의 성별(性別)을 감별하는 동안
달은 가장 피에 가까운 물방울처럼 아래로.
골목 세탁소 닫힌 셔터는 ‘이씨 상중’ 흰 A4 용지 한 장에 의지한다. 새가 멈출 때마다 허공은 나무 상자로 바뀌고, 이제 혼자가 된 애의 끌어모은 무릎 사이에선 그 나이엔 몰라도 좋을 당황이 시작된다. 나의 아홉 살엔 수많은 낙과(落果)와 폭풍이 흐르고, 줄타기 곡예사는 단 한 줄의 겨울로밖에 떠날 수 없었다.
시들고 싶어. 멈추지 않는 혀를 가슴에 달고, 달의 붉은 치마에 덮이고 싶어.
눈을 몸속에 집어넣고 게들은 유리처럼 저렇게 얇아지는데
아무것도 재현되지 않은 것처럼
결백이 사라지는 것처럼
바다라는 신발을 신은 여자가 물 위를 걷는다.
거의 모든 세상
침묵은 모두 너희들의 슬픈 눈알에서 온 것
나의 사랑하는 감미료들 폭설들
밤과 낮에 갇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신의 구두라는 걸 알지 못한다
내가 들어갔던 어떤 문보다 좁았던 겨울
고향집에서 껌을 보내와 아주 맛있게 씹었다
각설탕처럼 달고 네모난 그림자를 하나씩 쌓아올리며 발끝은 시작된다
장애물을 뛰어넘는 심정 겨울은 그래도 심심했다는 생각
감미료들 폭설들
그가 자살했어요
심해어처럼 모든 방을 홀로 떠돌고
포화지점을 지나 그가 최대가 됩니다
동쪽 끝에서 아니 거의 모든 세상에서
나의 사랑하는 감미료들 폭설들
나는 양말이 없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
약대지구의 덧없는 여름
나무는 허공의 발목에 마지막 원호를 그린다. 숨 죽은, 잠시 후 사라질 나무의 다락방에서 나는 어떤 고백을 들었다. 오래된 철근에서 땀이 줄어들 때 나는 기쁜 꿈을 안고 태양 아래를 걷는다. 그리워하지 말 것, 꽃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 풋과일보다 싱싱한, 연인의 머리핀. 붙어 있는 머리칼 몇 개, 풋과일보다 싱싱한, 연인의 머리핀, 붙어 있는 머리칼 몇 개, 보라색과 연초록의 글씨로 ‘Hello Kitty’, 내 치유는 그렇게 탄생했다. 우연히 우는 아이의 얼굴을 만졌다가 손을 자르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여름의 나무는 영원히 더럽혀진다. 찌그러진 잎새들이 태양을 무능하게 펼쳐놓지 않았다면 지하방들은 얼마나 자욱해졌을 것인가. 아이들이 손바닥 위에 우연의 이름으로 공기돌을 엮는다. 자명한 꿈 좁은 틈마다 여름이 못처럼 박혀올 때, 가족들이 술빵을 뜯어 먹을 때, 슬픈 아이에겐 젖니가 없다.
언덕길을 저녁의 입구로 만들던 고요한 철사들. 사랑스런 것들, 니네 할머니가 죽었을 때, 그날은 닭백숙을 먹었지. 깨끗이 뼈를 발라 먹으며 벽에 튀기는 아이들의 농구공 소리를 듣는다. 내가 가장 많이 잃은 공은 여름으로부터 와서 여름으로 가는 공. 철사들, 사랑스러운 것들, 니네 할머니가 죽었을 때, 그날은 누구의 무릎도 아프지 않은 곳에서 의지 없이 바람이 불었다.
길 끝의 엽사(獵師)들
여름의 사이렌이 울리던 길고 흰 길, 옥상 물탱크의 맑은 주저흔이 물 위에 떠간다. 밤의 물결 위를 떠도는 칸나의 계절, 너는 장례식장의 주인공이었고 우리는 잠들 무렵까지 매미우는 소리에 묻히는 길 끝을 바라봤다.
물 가까이에서 너는 첫 소절만 아는 노래의 첫 소절만 계속 불렀고 난 그게 슬퍼서 너를 짓밟고 싶었다.
버려진 방공호 속에서 과수원집 딸들에게 편지를 쓴다. 레이스 많은 치마를 입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우리는 애 밴 여자처럼 소중히 배를 끌어안고 아홉 달의 어설픈 잠을 잤다. 칸나에게, 어두운 인사법이 언제나 너를 지켜줄 거라 믿지 말아라.
무연고 시신이 모인 화장터에서 여자는 아버지의 얼굴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결국 주저앉아 곡성을 한다. 멀리서 한 무리의 수렵꾼이 고라니를 쫓는다. 다급한 너의 귀가 그립다.
무지개 산장의 개들
에스키모인들은 사로잡은 고래 턱뼈를 바다로 돌려주며 “내년에 또 오너라”오늘은 머리 위의 태양과 발에 밟힌 태양을 나누어 세었고요, 오늘은 또 많은 삽질이 필요하겠죠. “내년에 또 오너라” 난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죠. 빵처럼 부풀어 올라서 도저히 내 발등을 찍을 순 없었답니다. 태양이 태양에게 돌아갔어요, 그러니 이번엔 당신이 내 막대과자에 침을 발라줄 차례. 고무줄 위로 소녀들은 날고 세상엔 갑자기 너무 많은 처량한 벌레들. 악담은 나누지 말자, 한 번은 왼쪽 한 번은 오른쪽 바람개비는 허탈하게 자기의 귀로(歸路)를 정했다. 다음에 또 멀리서 온 편지를 받으면, 우리 그땐, 차분히 겉봉을 뜯지 말고 먼저 놀라는 연습을 하자. 이건 단지 무릎을 모으고 태몽 아래로 조금씩 가라앉는 연습.
철저한 야외
사진 앞에서 조카들은 두 번 절하고 울다가 웃다가 편육과 새우젓을 먹었다
여름의 분수는 더 이상 허공을 아물게 할 힘이 없고 이번엔 풀밭이 사라질 시간
날마다 살아갈 날의 지도를 한 장씩 잊어도 네겐 딱 하나 잊지 않은 게 있었다
네 피를 가득 담던 혈액 주머니처럼 반드시 꼭 한 번 계절은 표정이 없어진다는 것
칠석(七夕)의 나라
더 지킬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엄마 더 이상 밥상 앞에서 기도하지 마, 밥 앞에서 제발 눈 감지 마.
7월, 무너진 다리 아래서 언니는 아름다운 꿈 하나를 꾸었다.
이별은 단추보다 더 가벼워지고
헤어질 때마다 잇몸이 붓는 꿈.
흙 위의 낙서에게 아이들은 때 묻은 손을 흔들며 안녕 안녕. 악귀처럼 소리 질렀다.
또 만나면 그땐 네 이름과 내 이름을 섞어 말해줄래?
아마추어 물병 로켓이 여름 하늘을 가로지른다.
오늘 나의 아이는 손에 대한 기억 하나를 잃었구요,
미끄러지는 것만 상상하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어요.
차오르는 붉은 눈금 하나하나마다 내 이름이 바뀌려는 순간
아빠는 딸들에게 밋밋한 가방을 선물하고
더 좋은 걸 원하는 딸의 따귀를 때렸다.
느티나무 아래서 언니는 평화롭게 귀지를 파고
모래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새의 나침반을 돌려놓는다.
까마귀와 까치는 피맛투성이인 너와의 키스엔 몹시 안 어울렸어
언니는 죄가 없다는 듯 웃었고
그건 수의를 입은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X
미지수는 늘 미신과 맑스에 관대했다. 아카시아 잎 줄이 떼어 날리던 소녀들이 바람을 향해 시린 풍치를 꺼낸다. 처음 떠나는 여행은 모두 모정란. 변성기마다, 사춘기마다 길어지다 만 팔다리가 쌓인다. 나무가 물 밖으로 죽은 바람을 건져올리는 것이 오늘 내가 지켜봐야 할 우상(偶像)없는 숲이었다.
피아노 맨 왼쪽 건반도 태아의 어두운 눈동자보다 더 낮은 음계는 가질 수 없다. 깨진 창 덕지덕지 붙은 청테이프가 늘 똑 같은 몫의 채광(採光)을 깨진 유리에 붙여놓는다. 여름의 등나무는 행간마다 지리멸렬의 다산(多産)과 사산(死産). 섣부른 해후여도 좋은 건지, 친정 가는 길에 엄마는 잠깐, 아주 낯설게 웃었다.
허약한 7월 배웅없는 첫날, 반딧불이 성충이 감자밭에서 달팽이를 갉고 있었다. 얇은 가죽 속에서 너는 너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그 속에서 너는 1과 자기 외에는 나눌 수 없는 외로운 소수(素數)의 꿈을 꾸고 또 꾸었다. 어떻게 이렇게 신비한 벌레가 내 고향을 보여주는 걸까? 난 회향병(懷鄕病)을 앓았다.
목사관 가는길
저녁의 나침반은 바늘 끝에 어두운 길을 올려놓는다.
화분병(花粉病)을 앓던 언니들은 가버렸다.
구름 떼를 부르며, 수많은 발을 무겁게 구르며, 느릅나무의 연옥(煉獄)이 이어진다.
불편한 목례
고무찰흙 같은 손발을 달아주며 저녁하늘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는 걸
언니들이 서럽게 지켜봤다.
물속의 내 얼굴
나무 막대로 휘젓고 돌아온 날
불편한 목례
붉은 것은 신(神)의 고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물 밑의 피아노
누나가 바늘에 꿴 실로 글자를 쓴다. 작은 집들이 산턱에서 사라진 후 케이블카가 그 위를 종일 왕복하고 있었다. 누나, 피아노들이 떠오른고 있어. 앞코가 찢어진 신발 속으로 물이 드나들고, 누나의 글씨쓰기는 앞과 뒤가 하나의 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누나가 쓴 글자는 한없이 느려져 겨울이 되어서야 한 장의 편지가 될 것이다. 억울해 억울해 지덕노체 4H 구락부 마크가 찍힌 무너진 집 벽을 깎고 있었다. 생애 이렇게 눈부신 날, 누구나 자기 눈을 찌른 첫 번째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누른 검은 건반을 누나의 흰 건반이 감쌀 때, 피아노의 다리들은 물 밖을 나오지 않는 것으로 여름과의 약속을 지켰다.
철저한 야외
너는 투명해지기 위해 더 많은 각정제를 씹는다. 네 고향에선 비를 맞고 남의 배를 만져주는 게 풍습, 덧문을 꽉 닫고 체온이 가장 낯설게 부풀 때까지 잠을 잤다. 새를 볼 수 없는 계절도 있었다. 바람으로 짠 그물 침대에 누워 새의 비행법 중 이제 겨우 추락까지는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너는 안심했다. 좀 더 쥐기 쉬운 눈물을 가진 애들에게 허공은 날개 터는 소리로 채워지기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 검게 칠해본 적 없는 얼굴을 조금씩 아끼며 나눠 칠하자, 그러면 누군가는 다시 젖은 손을 두개골 속에 집어 놓고 파리 떼를 쫓겠지. 너는 양말을 신은 채 잠들고 골목길에 돌처럼 앉아 구기차를 먹었다. 동생이 줄긋기 연습을 하던 시간. 팔뚝에 붉은 줄을 긋고 조용히 울던 시간. 모두 비슷한 맛의 눈물을 흘린 시간. 난곡(難曲)의 악보를 계단 삼아 너라고 부를 수 없는 지점까지 너는 걸어간다. 난 단지 잡았던 끈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를 너에게 청한다. 너는 새끼 새처럼 빽빽거리며 이 방 저 방을 열어보고 부엌에 앉아 오물오물 생쌀을 씹었다.
키신의 나날
쉴 겸
페인트가 마르지 않은 벤치에 앉았다가
할머니는 붉은 색이 되어 돌아왔다
우리 할머니
지금도 하루에도 몇 번씩 씨발 주여 소리치고
중요한 건 똥도 먹었다는 것
갈대꽃 다 피었고
양말에 담긴 듯한 기분이 들 때
하염없이 듣던 모스크바 청중들의 박수 소리
키신의 나날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연호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 (0) | 2009.05.25 |
---|---|
[조연호] 루오상회에서의 일들 (0) | 2009.05.22 |
[박상순] 곤충의 가을 (0) | 2009.05.05 |
[조연호 제 2시집] 저녁의 기원 (0) | 2009.04.30 |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0) | 2009.04.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