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절거림

아직도 삶은 내게 새로운 것을 준다

by 발비(發飛) 2007. 8. 17.

이 블로그를 거슬러 1200개 쯤 전으로 가면 만나게 되는 꿈을 거짓으로 써 간 글이 몇 개 있다.

제본소여자라는...

파지를 읽는 여자라는...

그때도 난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밴딩 위에 얹혀있던 파지들을 읽는 것이 그 때 나의 아주 재미난 장난거리였다.

제본소에서 일하거나 인쇄소에서 일한다면 맨날 더 많은 파지를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난 진짜 그렇게 하고 싶었더랬다.

 

그러다 오늘 좀 까다로운 책이 있어 감리를 보기 위해 인쇄소에서 장장 6시간을 머물게 되었다.

점심을 먹자 파주로 가서 7시 40분쯤에 끝났으니...

꿈 하나를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종이가 탑처럼 쌓여있고,

빨강 노랑 파랑 까망 깡통들이 놓여진 인쇄틀이 차례로 놓여있다.

종이를 빨판이 한 장 씩 올려서 자동레일 위로 놓으면 종이는 틀 안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인쇄물이 되어 튀어나왔다.

이 색은 좀 더 노랗게,

이 색은 좀 더 흐리게,

간혹은 눈빼라는 은어로 불리는 렌즈에다 색망검사를 하며,

그러다 잠시 필름을 끼운다고 쉬는 시간이 되면, 옆 라인에서 돌아가고 있는 다른 출판사의 출판물들을 기웃거리며 구경하고,

다시 돌아와 색보고...

인쇄소 기장은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듯이 CMRK조절판 위를 손 끝으로 훑어가고,

그럴 때마다 내 생각과 점점 가까워지는 색들,

 

종이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쓰고,

그 위로 땀이 줄줄 흘렀지만,

내게 새로운 세계는 장장 7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흥미로운 새로운 세상이었다.

하얗게 종이 먼지를 쓰고, 까만 손톱을 가진 기장님에게 몇 년전 내 꿈이 이 곳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공간은 생각보다 더 신기하고 더 멋진 곳이었다.

 

아무리 인쇄소에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지만,

감리를 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종일 한 번도 앉지 못하고 서 있었던 나는 버스에서 늘어진 몸으로

참 새롭다. 아직 새롭다. 그럼 또 새로움이 있을 듯도 싶다.

아직도 내게 새로움에 설레이는 마음이 있다는 것,

마음 뿐만이 아니라 정말 내가 처음 겪는 새로움이 남아있다는 것이,

삶이란 그냥 개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을 만나는 과정일 것이라는 ...

왜냐면  버스 안에서 삶이라는 딱 한 글자가  오늘이라는 현재에 선명히 박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은 삶이었다.

오늘은 살아있었다.

 

 

 

 

 

'주절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쇄소에서  (0) 2007.09.03
지금 이 얼굴 이제 그만!  (0) 2007.09.02
어느 날의 길  (0) 2007.08.14
심야버스  (0) 2007.08.05
어느 벽  (0) 2007.08.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