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walk the line) 2005 미국, 135분.
제임스 맨골드 감독
와킨 피닉스(조니 캐쉬), 리즈 위더스푼(준 카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컨츄리 가수였던 조니 캐쉬와 그의 아내이자 음악적 동료인 준 카터의 삶을 그린 영화이다.
가수들의 삶을 다룬 영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예술가들의 삶은 그들이 남긴 작품만큼이나 굴곡이 많다는 증거이다.
한마디로 사연이 많다는 뜻이겠지.
'라밤바'가 그렇고
'더 블루스-소울 오브 맨' 그렇고
'레이'가 그렇다.
이들 영화들은 기본적으로 같은 구도를 가지고 있다.
우울할 때는 리듬을 즐겨봐-조니 캐쉬의 노래말
조니 캐쉬가 영화의 전반부에 갓 데뷔할 때 부른 노래이다.
우울할 때 리듬을 즐겨봐.
몸에 리듬을 맡겨봐.
그럼 몸이 알아서 스스로 치유하기도 하지.
아주 우울할 때,
노래방에서 누군가 부르는 부르스리듬에 맞춰 눈을 감고 몸을 맡기면 맘이 가라앉지.
리듬에 몸을 맡기는 것은 자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지.
앞에 서 있는 파트너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아니지.
우울할 땐 리듬을 즐기며, 그저 몸이 리듬을 타도록 내버려둔다.
멋진 일이지.
리듬을 즐긴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
어쩌다 말고 때론 자신감을 가져 봐-준 카터
존은 어릴 때부터 준을 좋아했었다.
준은 음악가족이었고, 존은 준의 노래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워왔었다.
아주 오랜 짝사랑을 만나, 가수라는 대등한 관계로 만났으나, 이미 서로가 결혼한 상태이다.
그렇지만 어이하리요. 사랑인 것을.
키스를 하고 만다.
키스를 한 후에 존은 어쩌나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자, 준이 한 말이다.
그렇게 진심이 아닌 말을 하기도 한다.
아니 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좋아하는 사람앞에서는 진심이 아닌 말만 하게 된다.
이상한 길로 항상 말의 길이 터진다.
상대가 그것을 못 알아듣는 것이 이상하다.
이 경우 나의 생각인데,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면, 말하는 그대로 오해해서 들을 듯 싶다.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진심으로 한 말인지 아닌지를 아는 일은 싶다.
왜곡되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미 상대도 그를 사랑한다는 뜻일 것이다.
상대도 이상한 방향으로 말의 길을 트고 있는거지.
you are not nothing, you are not nothing -준 카터
존은 마약에 중독된다.
마약! 그것은 유명한 아니 멋진 가수들의 필수코스인가? 참말로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전인권, 싸이, 이현우, 레이 찰스..... 그러니 그들을 어찌할꼬.
가수로서의 명예는 얻지만, 가족들이 모두 그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함께 하지 못하는 시간이 이해할 수 있는 노력을 멈추게 하는 것일 것이다.
가정생활이 파탄이 나고, 가수의 길도 파탄! 그는 자책한다.
그런 존에게 준은 말한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야. ..... 당신은 멋진 남자야."
그렇게 위로한다.
그 힘으로
단 한사람의 한 마디에, 그 힘으로 든든한 담에 기대어 안심하기도 한다.
한 마디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한 마디는 사람을 살게 한다.
자신을 좀 아끼란 말이야- 준 카터
누구나 자신을 수레바퀴 밑에 두려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레바퀴 밑에 들어가 연신 굴러오는 바퀴들에 깔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습게도 그 길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다.
자신을 아낀다면, 수레바퀴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아낀다?
자신을 아낀다?
나를 아끼면 수레바퀴밑에서 나와야 한다.
굴러가는 수레바퀴 밑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뭘하는지 알 수 있다.
돌아가는 수레바퀴 밑에서는 자신을 볼 틈이 없다.
굴러오는 바퀴 살을 피하는 것으로도 힘이 들다.
자신을 아껴야 한다.
한 번쯤 수레바퀴 밑으로 들어갔어도, 그것이 인생이라고 쳐도, 나와야 한다.
나와서 내가 어디까지 굴러왔는지, 묻어왔는지 봐야한다.
널 생각하니 걸을만 하던데-조니 캐쉬
마약중독으로 구속, 그리고 파산, 완전 거지가 된 채 마약에 절은 채
은행에서 더는 수표도 끊어주지 않는다.
전화가 끊어졌다.
준에게 갈 차비도 없다.
그는 준이 그립다. 준만이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이며, 기대로 싶은 여자이다.
사랑해주려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기 위해서 준을 찾아간다.
사랑은 희망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하면 내 삶이 밝아지기도 할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와 함께라면 내 삶이 풍요로워 질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런 준을 생각하면 몇 백 마일의 먼 거리라도 걸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빛을 따라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말이다.
약속을 한다.
말짱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오던 길을 돌아간다.
비가 내리고 산을 걷던 존은 쓰러진다.
그리고 산 속의 집 한채를 만나고 그 집에서 다시 시작한다.
아직은 마약을 끊지 못했지만, 빛을 만난 이후 그의 초록빛은 좀 짙어졌다.
단단해지기만 하면 되는데......
내가 죽고 형이 살았어야 해! 난 정말 쓸모없는 녀석이야-조니 캐쉬
결국, 그의 문제는 형이었다.
어린 시절 가장 친했던 형이다.
목사가 되려고 한 형,
열심히 부지런히 일을 했던 형.
아버지의 버팀목이었던 형,
자신의 꿈을 인정해주고, 가치를 인정해주던 유일한 존재였던 형이 죽었다.
자신과 함께 일하다가 자신에게 낚시하러 먼저 가 있으라고 하고 일을 마져 하던 형이 전기톱 사고로 죽었다.
형은 죽으며, 동생에게 눈물을 보인다.
동생을 두고 가는 형이었다.
아버지는 쓸모없는 인간인 존만 살아있다고 형의 죽음을 존의 탓으로 돌린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죽음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겐 그 슬픔이 당연하고 당당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같은 가족이면서 가장이 아닌... (말이 이상하다) 남은 이에겐 의무가 남는다.
가장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해야 하고 살아있는 자로서의 미안함으로 살아가야 한다.
존은 그랬다.
그는 처음 형이 죽었을 때 형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해서 사람들이 형을 듣기 싫어할까
그 다음부터는 형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형이야기를 준에게 한 것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골수에 박힌 외로움이나 고독은
슬픔을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서 아직 피를 흘리고 있는 상처때문이다.
어떤 이의 부재는 어떤 이와 관계 했던 모든이의 상처다.
그 상처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다.
상처가 크더라도 제대로 치료를 받으면 아물기도 하지만,
상처의 크기가 작더라도 제대로 치료받지 않으면 상처는 덧나고.... 점점 커진다.
어느 날을 큰 상처를 받은 이 보다 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럼 사람들은 말한다.
그 만큼 다쳤는데, 뭐가 아프다고 엄살 부리냐고 말한다.
치료하지 않으면, 위로 받지 않으면, 살펴주지 않으면, 어떤 작은 상처라도 덧나고 만다.
불쌍한 존!
그러는 넌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말할 수도 없구나 -레이 캐쉬
존의 아버지 레이는 존에게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다.
전쟁터로 가는 존에게 손도 잡아주지 않았다.
그건 담을 쌓아버린 것이다.
누가 부모 자식간이 천륜이라고 하는가?
부모 자식이라도 습관이다.
부모자식이라도 그 맘이 어떻든 습관이다.
누군 누구에게 이렇게
누군 누구에게 이렇게
하던 대로, 가던 대로 그대로 간다. 그건 부모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왜 약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말할 수 없는 건지, 단 1분만 생각하면 되는데,
세상에 부모라고 다 자식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력한 폭력이다.
그저 모든 이는 어른이 되어 그런 부모가 인간이구나 인정하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일뿐이다.
부모라서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서 그들이 모두 인간이라고
좀은 객관적으로 두게 되며 이해하는 것이다.
아직도 내 부모, 내 자식이라는 말에 정에 연연한다면 비아냥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누구나 그저 좀 거리를 둬야 한다. 그것이 부모 자식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는 아버지는 형이 죽을 때 어디계셨어요?-조니 캐쉬
강한 자에게 묻는다는 것, 그보다 힘든 일이 있을까?
강자는 항상 강자다.
어린 시절 폭력을 일 삼던 아버지는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 늙었더라도 강자로 남는다.
길들여진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에게 존이 묻는다.
그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앙금을 일으킨다.
형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돌렸던 아버지에게 당신은 어디있었느냐고 묻는다.
그 때 아버지는 술에 취해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존은 묻지 못했다.
그저 죄인의 모습으로 견뎠다. 그것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 길들여진 노예습성같은 것이다.
어디있었냐고 묻는 것,
대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왜 때리냐고 묻는 것, 왜 나에게 그랬냐고 묻는 것.
앙금을 스스로 일으킨 것이다.
앙금은 가라앉아 있으면 굳어서 콘크리트 처럼 딱딱하게 되어 결국은 숨통을 막아버리고 만다.
스스로 앙금을 일으켰다.
부모는 자식을 몰라-준 카터
그래 모른다.
누가 누구를 안다는 것. 힘들다.
상하관계에선 더더욱 알기 힘들다.
한 사람은 머리 꼭대기만 보고 한 사람은 발끝만 보인다.
당신을 떠나서 다시 마약중독자가 되기 싫어-조니 캐쉬
도와달란다.
용기 있는 존이다.
맘에 든다.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살겠다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의 노래는 긍정이다.
그의 노래처럼 그는 그의 삶을 긍정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준은 그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믿지 못한다.
you are best friend & marry me-조니 캐쉬
친구에게 청혼을 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나 배우자의 전제조건은 소통이다.
사랑이 과해도 병이란다.
과함이 친구라면 ... 과하지 않다.
아니 말이 안된다.
과한 친구가 아니라, 소통이 되는 사람에게 과함이란 있을 수 없다.
소통!
진정 영혼의 소통이 가능한 사람에게 청혼을 한다. 존이 준에게 청혼을 한다.
거절이다.
믿지 못한단다.
난 40번이나 다른식으로 당신에게 질문을 했어,이제 당신이대답을 할 차례가 온거야. -조니 캐쉬
준은 40번이나 거절했다.
왜? 존을 사랑하지 않아서? 존을 믿지 못해서?
아니! 그게 아니다.
준은 두번의 이혼을 했다.
1950년대 60년대 미국에서도 이혼은 여자에게 문제거리였다.
문제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이혼은 상처인 것이다.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존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준은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아는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사랑하면서도 ...... 상처때문에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종반부에 상처를 보듬어 줘야 할 사람은 준이었다.
사랑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해 어쩌지 못하는 것은 준이었다.
존은 이제 자신이 뭘해야 하는지 찾았지만,
똑똑한 준은 자신에게만은 결코 똑똑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만큼 상처가 큰 것이다.
마침내 예스라고 말했군- 조니 캐쉬
재기에 성공한 존이 콘서트를 한다.
잠시 "여러분 노래를 끊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준에게 청혼을 한다.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노래하지 않을거라고 우기며 대답을 기다린다.
이제 그는 확신한다.
그가 그를 털어내고 나서, 왜곡되지 않은 눈으로 본 세상은 취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분명해진것이다.
선명히 보인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갈등없이....
상대가 맑은 눈을 가지고 자신을 본다.
색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맑은 눈을 가지고 자신을 보고 있다.
그 눈동자를 보면 보인다.
"예스!"
어젯밤에는 조니 캐쉬의 노래를 다운 받아 몇 시간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힘찼고, 자신감이 느껴졌다.
나이가 먹어서 부른 노래에도 남는 기운이 느껴졌다.
영화에서 조니의 역을 했던 와킨 피닉스보다 더 잘생겼더라.....
실화를 다룬 영화는 소설보다 더 소설스럽다.
'보는대로 映畵'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 찰리와 초콜릿공장 (0) | 2006.05.03 |
---|---|
[미국]드리머 (Dreamer: Inspired By A True Story, 2005) (0) | 2006.04.14 |
[영화] 오만과 편견 2005 (0) | 2006.04.12 |
[미국]노트북 (The Notebook, 2004) (0) | 2006.04.06 |
[프랑스]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Et Dieu Cre'a la Femme) 1956 (0) | 2006.04.05 |
댓글